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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시절을 노래하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을 읽다가 놀란 점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일본의 시 장르인 ‘하이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도 일본 ‘바쇼’의 하이쿠를 읽은 적이 있고,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하이쿠의 예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책 속의 여러 강의 내용이 하이쿠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고, 시를 소개하면서 하이쿠를 아주 매력적인 장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서양에서 하이쿠의 위력 또는 매력을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된 작은 도서관에서 ‘하이쿠’ 창작 모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 하이쿠를 읽고 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무엇이 서양인에게 하이쿠가 매력적으로 다가갔을까요? 하이쿠에 나타나는 선시(禪詩)의 분위기가 작은 깨달음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우리 시조(時調)와 가사, 고려가요, 향가 등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시는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요? 어떤 매력으로 소개되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대부분의 시조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교훈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 같은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정철)’이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황진이)’ 같은 교훈성이 있는 시조가 많았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만 학생들은 시조의 매력에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문학 교육이 오히려 문학 향유에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문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고, 절묘한 가락을 담은 시조를 가르치고 기억하게 한다면 시조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겁니다. 여러 작가가 노력하고 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좋은 시조나 가사, 고려가요, 향가를 문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라 향가가 일본의 만엽집처럼 많이 남아있다면 좋을 텐데요. 현존하지 않는 향가집 삼대목이 발견되기 기대해 봅니다. 남아있는 신라시대의 향가 14수에서 향가의 매력을 다 찾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저는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음에 나는 간다고 말도 못다 이르고 가는가(제망매가)’에서 누이를 잃은 깊은 슬픔에 동감합니다.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고려가요는 우리의 감정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민요와 이어지는 깊은 연계도 느낍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가시리)’나 ‘살어리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청산별곡)’의 운율과 솔직함을 만납니다. 시조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등의 묘사에서 낭만을 만납니다.   향가에서 고려가요로, 다시 시조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 노래들입니다. 시조의 매력을 잘 살피고,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에게도 알리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넘어서는 공통의 감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알리지 못한 매력을 찾아내어 세계 속으로 잘 소개해야겠습니다. 좋은 번역이 필요한 이유도 되겠습니다. 시조(時調)의 시는 때라는 뜻입니다. 한 시절을 노래하는 시(詩)가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노래 우리 시조 향가집 삼대목 가사 고려가요

2025-01-19

[중앙칼럼] “산불 영향 제한적” 월가의 오류

“LA 산불이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월가가 내놓은 분석이다. 주택 임대료와 건설 자재, 주택 건설 근로자 임금은 국지적으로 상승 압력을 예상했다. 단 전국적인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봤다.   월가의 분석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LA산불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다. ‘팰리세이즈 산불’ 진압률은 22%, ‘이튼 산불’은 55%다. 진화 작업이 진전되면서 산불이 휩쓸고 간 LA 실제 경제 상황은 경기침체, 트럼프 정부 관세 부과와 다른 또 다른 위기가 몰려오는 형국이다.   팰리세이즈와 이튼 지역 산불로 4만 에이커가 불타고 건물 약 7000채가 손상되거나 전소됐다. 대피하거나 집을 잃은 주민은 약 10만 명에 이른다.   화재 지역에서는 주택소유주들을 대상 각종 사기 행각이 활개치고 있다.   화재로 파손된 주택이나 대지를 현금으로 사겠다고 호객하는 부동산 업자와 금융업체들이 몰려들고 있다. 화재로 경제적 어려움 또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주택소유주들에게 접근해 땅을 현금으로 사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LA카운티 검찰과 가주 법무부는 폭리 및 사기 사례 조사에 착수했다. 주정부도 바로 화재 지역 주택소유주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사기 행각에 대한 행정 조치에 나섰다. 특히 이튼 화재 지역의 중산층 시민들에게 관련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관련 영업 활동을 3개월 동안 제한했다.   렌트비 급등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지난주 팰리세이즈 인근 베벌리 그로브 인근 지역 2베드룸 아파트가 5000달러에서 8000달러로 폭등했다.   베니스와 샌타모니카 인근 아파트 렌트비도 최대 60% 인상됐다. 집을 잃고 주거 공간이 필요한 산불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건물주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이에 LA카운티는 호텔, 모텔, 임대주택 등의 렌트비 상한선을 10%로 제한하는  폭리 금지 조치를 3월 8일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강력한 처벌 조치도 들고 나왔다. 규정을 위반한 건물주는 수천 달러의 벌금은 물론이고 실형에 처해질 수 있다. LA 시의회는 이미 지난 14일 렌트비 인상 위반에 대해 최대 3만 달러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산불 피해자를 도우려는 기부를 악용하는 소셜 미디어 활동도 포착됐다. 사기꾼들이 가짜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기부 요청을 하고 있다. 기부 전 출처를 확인해야 한다.   LA산불로 LA 부동산 시장은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화재로 매물이 감소하면서 임대 및 주택 가격이 벌써 들썩이고 있다. 피해 지역에 주택 수요가 급증했지만 매물 공급이 부족해 경쟁 심화가 예상된다. 임대시장에서는 단기 및 장기 임대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면 뒷채(ADU) 건축이 간소화되고 캘리포니아 환경법 및 해안법 면제 연장으로 재건축 속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산불로 피해 지역 복구에 여러 해가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재건 과정에서 경제적 격차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부유한 지역이 재정적 능력 덕분에 더 빠른 복구 서비스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컨트랙터나 건설업체와 계약하려면 가장 빨리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산불 대응 과정에서 피해자 간 불평등에 대한 논란도 거론됐다. 부유층 지역(팰리세이즈, 할리우드) 피해는 대서특필되지만, 중산층 지역(알타데나)의 피해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재건과 복구의 시간이 다가왔다. 피해 지역에서 정부, 지역사회, 보험사 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피해자들이 임대료 폭리나 사기에 당하지 않도록 강력한 법적 보호 조치가 지속해서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산불 영향 이튼 산불 화재 지역 인근 지역

2025-01-19

[열린광장] 노숙자 돕기로 한인 위상 높이자

살다 보면 위기를 맞을 수가 있는데 그럴 때 대다수 사람들은 상심하며 주저앉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선장은 풍랑을 만났을 때 돛의 방향을 조절하여 더 빨리 가도록 그 바람을 역이용하듯 위기를 기회로 이용합니다.   LA다운타운에 갈 때면 여기가 정말 미국 맞나 서글픈 생각마저 드는 풍경들을 어디에서나 보게 됩니다. 넘쳐나는 노숙자들입니다. 앞으로 더 나아질 가망보다 악화할 가능성을 더 염려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 한인의 위상을 크게 높일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노숙자 문제는 그 해결을 정부에게만 기대할 수도 없고 또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특히 교회 같은 종교기관이나 일반 사회단체들이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모두가 함께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완전 해결’은 어려울 것이지만 노력하는 우리의 관심과 마음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만 바꾸면 절호의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 이 위기 상황을 우리 한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서 이루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저분한 골칫거리들로 보일 수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내 가족과 똑같이 귀한 생명체들입니다. 아무도 원치 않고 멀리하려는 그들을 우리 한인들이 보듬어 안으면 미국사회에서 한인의 위상을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남가주 지역에 1500 개가 된다는 한인 교회들이 앞장서서 노숙자 재활을 돕는 시설을 교회나 기타 적절한 장소에 설치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선행을 실천한 교회와 최고급 초호화판 교회당을 비교할 때 어느 교회가 주민들의 칭찬을 받을까요. 물론 집값 떨어뜨린다는 일부의 항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주변 몇 교회들이 합동으로 번갈아 가며 음식제공도 하며 돕는다면 교회도 살아날 것입니다.     또 그 아름다운 선행이 주류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한인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시설은 홈디포 같은 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간단한 조립식 창고 같은 것으로 만들고 이동식 화장실 및 샤워실만 갖춰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비용은 모금 캠페인을 벌여 힘을 합하면 어렵지 않게 설치할 수 있습니다.   한인 정치인들이 나서서 장소나 시설 구하는 것이나 법적 문제 해결해 주고 각지역 한인회나 교회 젊은이들이 봉사에 참여한다면 그 자체가 한인 정치인의 선거운동이 될 수 있어 정계진출도 쉽게 도모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네들이 노숙자들을 쫓아내려고만 하는 이런 때에 부모세대의 그런 활동을 자녀들이 보고 자라도록 하는 것은 그 무엇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산 교육도 될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한두교회에서 1년 정도 한시적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은다면 한인 위상 제고, 정치인 배출, 자녀교육 등 일석삼조의 효과 있는 캠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김홍식 / 은퇴의사열린광장 노숙자 한인 우리 한인들 한인 위상 한인 교회들

2025-01-19

[독자 마당] 그녀의 백팩

사람의 머릿속은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들고다니는 가방 속과 그 사람이 사는 집안 구조와 같다고 한다.   오래전, 겨울이 끝나가는 화창한 날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웠다. 중요한 서류를 룸메이트가 뒤질까 봐 몽땅 들고다니는 그녀가 또 그 무거운 주홍색 백팩을 메고 나올까? 궁금했다.     맨해튼 다운타운 워싱턴 스퀘어에서 만났다. 나는 봄볕에 달구어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멀리서 주홍색이 세월의 때가 묻어 갈색이 된 백팩을 메고 구부정하게 걸어오는 그녀를 금방 알아봤다. 그녀는 가방이 안전하고 편하도록 벤치에 기대놓고 자신은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백팩이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다고 했더니 “무게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남편과 이혼한 서류를 넣었더니 커졌다”고 했다.   “결혼했었어요? 나는 싱글인 줄 알았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어린 나이에 한국에 파견된 미군과 결혼하고 조지아주로 왔어요. 미국이 화려하고 좋은 줄만 알았지 그런 시골에 많은 식구와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줄은 몰랐어요. 남편은 술만 마시면 얼굴값 하는 X이라며 저를 두들겨 패기 일쑤였어요. 그곳에서 버티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뉴욕으로 도망 왔죠. 보시다시피 제 얼굴이 조금 반반하지 않나요?”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드문드문 있긴 하지만, 흰 피부, 짙은 쌍꺼풀 눈, 적당히 솟아오른 코, 뚜렷한 인중 밑에 얇은 입술은 말할 때 떨리는 듯했다.     꾸미지 않고 뒤로 질끈 묶은 머리털은 거칠었다. 짊어진 커다란 가방에서 시선만 떼고 자세히 관찰했다며 예쁜 얼굴임을 알아봤을 것이다. 몸매 또한 옷만 제대로 걸쳤더라면 팔다리가 길고 균형 잡힌 체형이다.     허스키 목소리는 쾌활하게 톤을 높였다가 금방 축 처지는 공허한 낮은 소리로 일관성 없이 수시로 변했다. 말을 멈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는가 하면 불안한 자세로 몸을 웅크리고 뭔가 두려운 듯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빡했다는 얼빠진 표정의 씁쓸한 미소로 허리를 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혼을 해주지 않아 미루다가 그간 수없이 많은 서류가 오가면서 드디어 얼마 전에 서류 정리가 끝났어요.”   이혼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은 홀가분하고 가벼워진 듯 미래에 대한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녀의 등에 업혀 바래고 피곤해져 갈색조로 변해가는 백팩이 마치 생명체를 띄며 이제는 그만 그녀의 등에서 내려서 쉬고 싶다고 진지하고 묵직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듯했다. 이수임·맨해튼독자 마당 백팩 주홍색 백팩 허스키 목소리 서류 정리

2025-01-19

[발언대] 산불 대피 도중 찾은 가족 이민사

지난 7일 LA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 저는 가족 소지품을 모두 챙기기 위해 할리우드에 있는 부모님댁으로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화재로부터 안전합니다.     가족 소지품을 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족 사진 앨범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우리 가족의 여정을 되돌아보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 가족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마침 지난 1월13일은 1903년 첫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고 한인 사회의 놀라운 공헌을 기리는 미주 한인의 날이었으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76년 조부모님과 고모 두 분, 큰삼촌은 서울에서 LA로 이민을 왔고, 아빠는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미국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제한된 영어 실력으로 청소부, 자바 시장 바느질, 델리 용품 배달 등 고된 육체 노동으로 돈을 모아 서로를 부양했습니다.     그들은 힘든 직업과 희생을 통해 할리우드에 가족 주택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저축했고, 이곳은 저를 포함한 다음 세대의 안식처이자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아빠와 삼촌은 주류 판매점을 운영했지만 LA폭동으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밤낮으로 돌아가며 가게를 지키다 폭행을 당해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두 분은 사업을 지붕설비로 전환하여 서로 무역을 배웠고, 현재까지 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한 엄마는 2003년 코리아타운에 진발레스쿨을 열어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봉사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습니다.     어렸을 때 주말이면 할리우드 보울에서 열리는 한국 문화의 밤,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한국의 밤 등의 행사에 참여해 LA 지역 사회 곳곳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가족의 이민 여정은 수많은 다른 이민자들처럼 회복력, 단결력, 결단력을 상징합니다. 소박한 시작부터 LA에서 유산을 쌓은 현재까지의 우리 가족의 뿌리가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또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우리 가족이 LA와 커뮤니티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아이린 최 / 레드스톤 에퀴티 부사장발언대 이민사 산불 가족 이민사 가족 소지품 가족 주택

2025-01-19

[우리말 바루기] 판이하게 다르다고요?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다 보면 부부간에 취향과 습관이 비슷해져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분명 존재하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면 이러한 차이에 대해 “우리 부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문제가 생기면 매번 싸움으로 끝난다” “판이하게 다른 취향 때문에 취미 생활을 같이할 수 없다”와 같이 푸념하는 글이 많이 올라 있다. 하지만 “판이하게 다른 성향과 성격을 지니고 있어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판이하게 다른 취향 차이로 인해 다양한 취미 생활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른 점이 나쁘기도 하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위에서 말한 ‘판이하게 다른 성격’ ‘판이하게 다른 취향’ ‘판이하게 다른 성향’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판이한 성격’ ‘판이한 취향’ ‘판이한 성향’으로 고쳐 써야 바르다.   ‘판이(判異)하다’는 ‘판가름할 판(判)’ 자에 ‘다를 이(異)’ 자를 써서 비교 대상의 성질이나 모양·상태 등이 아주 다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판이하게 다르다”고 하면 “아주 다르게 다르다”와 같이 중복된 형태가 되므로 ‘판이하다’ ‘다르다’ 중 하나를 선택해 써야 한다.   많은 이가 “판이하게 다르다”고 쓰는 이유는 ‘판이하다’를 ‘아주’ ‘매우’ 정도의 뜻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이하다’는 ‘다르다’와 의미가 중복되므로 같이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와 비슷하게 간혹 “상이하게 다른 계약 조건 때문에 협상이 결렬됐다”와 같이 ‘상이하게 다르다’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상이하다’가 ‘서로 다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중복된 표현이 될 수 있으니 ‘상이한 계약 조건’ 또는 ‘매우 다른 계약 조건’ 등으로 고쳐 써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판이 취미 생활 취향 차이 취향 때문

2025-01-19

[사설] 윤 대통령 구속, 후진적 권력구조 개편 논의로 이어져야

━ 개인 법적 책임 추궁에 그치면 역사 발전 없어 ━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시스템 바꿀 때 어제 새벽에 윤석열 대통령이 결국 구속됐다. 한국에서 전직 대통령 구속은 네 번 있었지만, 현직 대통령 구속은 사상 처음이다. 제3세계 저개발국가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현직 대통령 구속은 정파를 떠나 한국 정치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정치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먼저 윤 대통령의 구속이 본인이 일으킨 비상계엄 사태의 응보(應報)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제 윤 대통령은 서울서부지법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해 “비상계엄은 대통령 권한이고 내란이 될 수 없다”고 강변했으나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법 절차에서 구속영장 발부의 의미를 고려할 때, 앞으로 윤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기소될 경우 법원이 어떤 판단을 할지 그 기류를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 구속으로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구속된 인사는 11명으로 늘었는데, 일단 계엄의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사법처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해 사법부의 엄정한 판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단순히 관련자 처벌로만 끝내면 아무런 역사의 발전이 없다. 비상계엄은 대통령 1인이 엉뚱한 망상에 빠져 아무런 주변 견제도 받지 않고 홀로 정권을 파국으로 몰고 간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극명히 드러냈다. 비상계엄이 6시간 만에 종료됐길래 망정이지 만약에 국회 봉쇄가 성공했더라면 지금쯤 국민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뻔했다. 이번이 극단적 사례이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한국 정치는 대통령 권력 집중에 따른 심각한 폐해를 겪어 왔다. 대통령이 공천을 사실상 좌우하면서 여당 의원들은 청와대의 거수기로 전락했다. 대통령과의 개인 친분이 권력이 되면서 공적 시스템은 무력화되고 이른바 ‘실세’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대선 때마다 막대한 사표(死票)가 발생하고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된 야당은 임기 5년 내내 반정부 투쟁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 여소야대가 되면 이번엔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의 충돌로 국정이 마비된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에서 무려 29번이나 탄핵안을 발의(13건 본회의 통과)하고, 윤 대통령과 대통령 대행이 도합 34번의 거부권을 행사한 건 승자 독식의 대통령제가 더는 작동하기 힘들다는 신호나 다름없다. 정치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양당 정치의 폐단도 심각하다. 지금 윤 대통령도 싫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싫은 사람은 갈 곳이 없다. 중도파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원적 정치체제 구축이 절실하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윤 대통령의 사법처리가 단순히 개인의 법적 책임을 따지는 일에 그쳐선 안 된다.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다시 한번 환기했으며, 87년 헌법 체계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권력구조 개편을 위해 머리를 맞댈 때다.

2025-01-19

[사설] 초유의 법원 난입·난동…‘무관용 원칙’으로 엄단을

━ 서울서부지법 폭력 사태, 민주주의 정면 도전 ━ 엄중한 수사·처벌 필요…정치권도 선동 멈춰야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자를 자처한 시위 군중이 법원 건물 안으로 난입해 유리창과 집기를 부수며 난동을 부린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어제 오전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울서부지법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부 시위대는 위협적인 욕설과 함께 영장 발부 판사의 이름을 부르며 판사 개인 집무실까지 뒤지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난동을 저지하려던 경찰관 여러 명이 심하게 다쳤다. 법원에 대한 난입·난동은 법치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행위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태가 202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는 현실 앞에서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법원은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에 해당한다. 그런 법원을 공격한 시위대는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천대엽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은 어제 서울서부지법 피해 현장을 둘러본 뒤 “국민 여론이 많이 분열된 상황은 알지만 모든 것은 헌법이 정한 사법절차 내에서 해야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이 정한 사법절차 준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뒤집으려는 이들은 곧 반국가세력이며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일부 정치인이 시위대의 폭주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선동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노종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법원 담장을 넘다가 경찰에 체포된 17명에 대해 “(경찰) 관계자와 얘기했고 아마 곧 훈방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설사 국회의원이라도 불법행위를 선동한 게 사실이라면 법적·정치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지자들을 향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던 윤 대통령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어제 변호인단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만시지탄이다. 경찰은 그제와 어제 이틀간 현장에서 87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해 수사 중이다. 이들 외에도 추가로 법원에서 난동을 부린 이들을 찾아내고, 혹시 배후 선동자는 없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비슷한 일이 서부지법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문제다. 윤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 중인 헌법재판소와 향후 형사재판이 진행될 법원도 공격받을 수 있다. 당국의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법을 우습게 보는 이들에게 법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건 당연한 조치다. 경찰 등 관련 기관은 대한민국 사법 체계를 유린한 이들에 대해 철저한 수사와 무관용 원칙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25-01-19

[이하경 칼럼] 윤석열 끝났으니 이재명도 끝내자는 것인가

정치적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망상에 사로잡혀 내란을 일으킨 현직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되자 일부 지지자들은 폭도가 돼 법원에 난입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몰락한 윤석열 대통령을 하루라도 빨리 추방하려고 핏발을 세워 왔다. 이제 속이 시원한가. 그는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재판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해야 한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민주당을 추월했다. 윤석열이 끝났으니 이재명도 끝내자는 것이 민심인가. 혼란을 정리할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윤·이에게 매달리며 상대에 삿대질 독재자와도 대화…양김 하나 만든 타협의 정치인 김상현 해법 절실 개헌 통해서 제7공화국 열어야 우리는 ‘1987년 체제’에 살고 있다.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민주주의 모범국이었다. 다만 헌법을 고치면서 열망했던 “내 손으로 뽑는” 대통령 직선제에만 치중했다. 유신헌법의 제왕적 대통령제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권력이 발작을 일으켰던 원인이다. 대한민국을 리셋해야 한다. 개헌으로 제7공화국을 열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87년 5월 탄생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가 학생·시민들과 함께 6·29 항복 선언을 이끌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신인 김덕룡은 “민추협이 없었으면 신민당 창당도, 6월항쟁도 없었다. 후농(後農·김상현의 호)이 민추협 탄생의 일등공신이다”고 했다. 후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71년 대선후보 선출 역전 드라마를 만든 주역이었다. 80년대 중반 김대중은 김영삼을 불신했고, 민추협과 신민당에도 부정적이었다. 후농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 양김을 하나로 만들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렸다. 김대중은 85년 2·12 총선 나흘 전인 2월 8일 귀국했다. 후농은 귀국환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김대중을 신민당 돌풍의 주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신민당이라는 거대 선명 야당이 탄생했기에 87년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의 장기집권이 무산됐다. 87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던 후농은 김대중이 ‘4자 필승론’을 꺼내며 평민당을 창당하자 참여를 거부했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들어갈 때도 결별을 선언했다. 천하의 양김을 하나로 만들고, 거역한 정치인은 후농뿐이다. 이로 인해 인간적·정치적 상처를 입은 것은 그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후농은 타협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원칙은 타협하지 않았다. 1967년 후농은 돈키호테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유진오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을 약속받았다. 유진오도 동의했지만 당내 반발로 무산됐다. “사쿠라” 소리를 들었고, 화형식까지 당했다. 이때 박정희에게 “야당을 포용해야 한다. 야당이 왜 민주화 운동을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박정희가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일이 있다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 투쟁을 하시오”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했다. 후농은 약속대로 72년 유신 반대에 앞장서 투옥됐다. 후농은 1979년 11월 보안사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엿새 되는 날 전두환 사령관에게 불려가 둘이서 양주를 마셨다. 꼬여버린 정국을 수습할 방안을 묻자 “정치적 반대세력이 서로 화해하고 대타협을 하는 길밖에 없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전두환이 감옥에 보내자 그를 위해 “정치를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10·26 이후 재야 인사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 모여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즉시 퇴진하라”고 했다. 그는 “군부가 나설 빌미를 준다”며 홀로 반대했다. 민주당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무리하게 탄핵했고, 중도층 민심이 떠난 장면과 오버랩된다. 이 대표가 “한 대행을 탄핵하지 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후농은 어릴 적에 껌팔이, 구두닦이를 했다. 땅굴을 파고 살면서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고향 장성에서 무의(巫儀)를 집전하는 ‘당굴’이었고, 한국전쟁 때 빨치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총살됐다. 와중에도 “나 혼자 밥을 해줬다”며 다른 여인들을 살린 의인(義人)이다. 후농도 휴머니스트다. 자기를 혹독하게 고문한 사람도 문상을 갔다. 보안사 요원들이 골병든 그를 집에 떨궈놓고 가려 하자 “당신들이 무슨 죄냐. 밥이나 먹고 가라”며 붙잡았다. 이들은 평생 후농을 존경했다. 명색이 헌법기관이라는 사람들이 이재명과 윤석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상대에게 삿대질한다. 구차하고 한심하다. 최근 후농 평전을 낸 김학민과 고원은 “그에게 정치란 선과 악이 서로 섞이고 소통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영역이었다”고 평가했다. 후농의 가톨릭 세례명은 베드로다. 허술하고 비겁하며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참회했던 인간적인 사도(使徒)여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함세웅 신부에게 고백했다. 유독 눈물이 많았지만 저 사나운 원수까지 품었던 정치인, 상처투성이인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휴머니스트의 생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하경(lee.hakyung@joongang.co.kr)

2025-01-19

[정철근의 시시각각] ‘트럼프 스톰’ 속 표류하는 한국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구속됐다. 상황이 정리 수순으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갈수록 혼란은 격화하고 있다. 이런 사이 한국 경제의 운명을 위협할 ‘퍼펙트 스톰’이 상륙했다.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트럼프는 취임과 동시에 캐나다와 멕시코의 모든 제품에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해선 60%의 관세를 매기는 등 1기 때보다 더 강력한 관세 압박이 몰아칠 전망이다. 이른바 ‘트럼프 스톰’이다. 관세 폭탄·한미 FTA 재협상 예고 윤 대통령 구속, 한 대행도 탄핵 여야 극단 대립은 재앙 부를 것 캐나다와 멕시코 모두 트럼프 스톰을 맞았지만 대응 양상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9년간 캐나다를 이끈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트럼프 당선 전부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민자 급증으로 인한 주택 가격 급등, 고물가·저성장으로 지지율이 바닥이었다. 그는 트럼프로부터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는 조롱을 당한 끝에 결국 사임했다. 반면에 취임 100일밖에 안 된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의 행보는 당당하면서 신속하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지난 13일 ‘멕시코 플랜’을 발표했다. 트럼프의 요구대로 중국 수입품 대체, 세관 단속을 강화하는 방안을 포함했다. 좌파 성향인 그는 예상을 깨고 민간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등 친기업 정책을 내세웠다. 취임 초기지만 셰인바움 대통령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한다. 이런 응집력은 “트럼프와 대화하되 종속은 거부하겠다”는 그의 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기 트럼프 체제가 출범했는데 한국의 대응은 윤석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직무정지 상태다. 한덕수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 13일 만에 야당의 주도로 탄핵안이 가결돼 헌재에 계류 중이다. 한 총리는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노무현 정부 때는 한·미 FTA 체결지원회 위원장과 총리를 지냈다. 12·3 계엄 선포 후 극도의 혼란 상황에서 경제를 챙기고 트럼프의 통상 압력에 대응할 수 있는 적임자다. 하지만 탄핵을 서두르는 야당의 폭주에 한국은 트럼프 스톰을 헤쳐 나갈 노련한 선장을 잃었다. 8년 전 한국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 와중에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당선됐다. 트럼프는 취임 초부터 한국산 세탁기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등 한국을 거세게 압박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트럼프 스톰에 대한 대응은 늦었다. 문재인·트럼프 정상회담은 트럼프 취임 5개월이 지난 2017년 6월 30일 이뤄졌다. 회담은 트럼프의 거친 언행으로 굴욕적인 분위기에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문 대통령은 그 뒤 통상 전문가 김현종씨를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임명, 한·미 FTA 재협상을 끌어냈지만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트럼프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12일 니어재단이 주최하는 ‘미 새 행정부의 세계전략과 한국의 대응’이란 포럼을 참관했다. 12·3 계엄 사태 전이라 이날 포럼에 참석한 외교통상 전문가들의 전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관련 부처를 포함한 통합대응팀을 구축해 포괄적인 대응전략을 마련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계엄 사태 후 돌아가는 현 상황은 8년 전 박근혜 탄핵 정국보다 훨씬 절망적이다. 그 당시엔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를 흔드는 시도도 없었고, 탄핵을 둘러싼 여론도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분열되지 않았다.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험난하다. 미국의 관세 폭탄, 중국의 공급 과잉, 자원 무기화 등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 스톰 같은 외부 충격에 대응하는 데는 정부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상대방을 무조건 비토하는 극단적 대립에서 벗어나 여야가 국익을 위해 협치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 국제정세의 격변에 대응할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대한민국은 트럼프 스톰의 격랑 속에 방향을 잃고 영영 표류하게 될 것이다. 정철근(jcomm@joongang.co.kr)

2025-01-19

대통령직이 ‘상머슴’인 줄 모르면 탈이 난다 [김성탁의 시선]

윤석열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 발생 47일 만에 구속된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와 구속은 헌정 사상 유례가 없지만, 그의 혐의가 워낙 위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 소추를 받지 않는데, 유일하게 제외되는 게 내란 또는 외환죄를 범했을 경우다. 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계엄 수행 가담자들이 대부분 구속됐는데, 그 수괴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구속을 면할 길은 당초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윤 대통령과 변호인단이 체포 적부심 등 법적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제대로 수사에 응하지 않아 증거 인멸 우려까지 떠안았다. 서울구치소에 있으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고 있다고 변호인단이 전하지만, 윤 대통령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인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오르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빠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탄핵 찬성 여론은, 다소 줄어들긴 했어도, 반대 여론보다 훨씬 높다. 윤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이미 여론은 탄핵 인용 시 치러질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 이재명 정서가 강한 보수층과 중도층이 결집하는 양상인데, 윤 대통령이 지지층을 상대로 메시지를 계속 내는 것도 정권 재창출에 힘을 보태기 위함일 것이다. 여소야대는 주인이 깔아준 조건 총선 자멸하더니 부정선거 맹신 주자들도 고개 쳐들면 같은 신세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 발생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통령직이 ‘상머슴’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불릴 정도로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다. 그래서 당선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방법이 선거다. 2022년 대선에서 윤 대통령은 0.73%포인트 차이로 승리했고, 지난해 총선에선 여당이 참패하면서 압도적인 여소야대가 나타났다. 이게 주권자가 머슴들에게 깔아준 조건이다. 여소야대에선 국정 운영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윤 대통령은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민주당이 감사원장까지 탄핵하고, 정부 예산안을 감액 심사만 한 채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키는 무리수를 둔 것 등은 매우 부적절했다. 하지만 야당 의석 역시 국민이 선거에서 부여한 것이다. 무모한 계엄을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야당의 행태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상머슴을 시켜놨더니 다른 머슴과 수가 틀어졌다고 집안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대 정부에서도 여소야대 때마다 여권은 골머리를 앓아왔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여대야소가 나타났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이 처음이었다.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여대야소였던 경우는 이명박 정부가 유일하다. 여소야대를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노태우·김대중(DJ)·김영삼(YS) 정부에선 합당이나 의원 꿔주기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됐었다. 우리 국민이 한쪽으로 권력을 몰아주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이해했다면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대신 다른 노력부터 기울였어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수 정부를 내세우면서도 극우세력과 거리를 두면서 전향적인 대북·북방 정책을 성공시켰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야당의 행태가 못마땅했다면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총선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명품백 수수 의혹 등 김건희 여사 관련 사안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이준석 전 대표 축출, 해병대원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의 갈등 등의 과정에서도 용산의 일방통행이 두드러졌다. 역대 대통령들이 가족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 직접 수사를 지시하는 등 매몰찬 모습을 보인 것은 모두 국정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조치는 하지 않고 부정선거 때문에 졌다는 음모론을 맹신하는 건 온당치 않다. 벌써 조기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가득 차 있을 여야 주자들도 자신들이 머슴이라는 생각을 잊었다가는 윤 대통령과 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야당 대표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고위 공직자라고 해서 무조건 존중해주지 않는다. 평생을 투신했던 일부 정치인의 공헌은 인정하지만, 대체로 한국 민주화는 국민이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권자가 잠시 맡긴 권력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머슴은 대가를 치러왔다. 출렁이는 여론조사는 주인들이 이미 보고 있다는 신호다. 누가 고개를 쳐드는지를. 김성탁(sunty@joongang.co.kr)

2025-01-19

"예스맨 아니면 해고"…230만 美공무원 덮친 '트럼프 PTSD' [정강현의 워싱턴 클라스]

오늘(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제47대 미국 대통령 취임하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다. 이번 2기 때도 트럼프의 변하지 않는 슬로건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트럼프는 1기 때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갖추고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해 자신의 입맛대로 입법부터 행정까지 가능해졌다. 아마존과 메타, 현대차·토요타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취임식에 100만 달러(약 14억 7000만원)를 앞다퉈 기부하며 ‘눈치작전’을 펼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막강해진 트럼프 2.0 “‘예스맨’ 아니면 해고” 트럼프는 “취임 첫날만큼은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취임 당일에만 100개 이상의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집중된 권력을 기반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설정해 놓은 각종 정책 방향을 완전히 뒤집겠다는 방침이다. 그 핵심에는 ‘공무원 대량 해고’라는 목표도 설정돼 있다. 트럼프는 대선 때 “취임 첫날 부패한 좌파 관료 기득권을 해고하겠다”고 했다. 현재 미국엔 약 230만명의 연방 공무원이 있다. 이 가운데 정무직 4000여명이 우선 해고 검토 대상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해고 기준은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이다. 실제 트럼프 인수팀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소속 ‘늘공(직업 공무원)’을 대상으로 충성도를 검증(AP통신)한 것으로 파악됐다.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는 “(트럼프 2기가 시작되는) 20일 낮 12시 1분에 모든 인력은 (일단) 사임할 것”이라며 “우리가 데려갈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의 의제와 100% 일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연방 공무원들 사이엔 ‘PTSD(트럼프 대통령 스트레스 증후군, President Trump Stress Disorder)’란 신조어가 돌기도 한다. 연방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일대 부동산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해고에 대비해 다른 주로 이사를 검토하는 문의도 늘고 있다. 20년째 미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연방 공무원은 기자에게 “언제 짐을 싸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 직장 동료들 사이에 파다하다”고 전했다. ━ ‘딥 스테이트 음모론’의 정치화 트럼프가 공무원 대량 해고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배경으론 ‘딥 스테이트 음모론’이 꼽힌다. 트럼프는 1기 때부터 자신을 적대하는 비밀 세력이 연방정부 곳곳에 숨어 있다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잦아들긴 했지만 트럼프는 2023년 1월 1일부터 지난해 4월 1일까지 트루스소셜에 “딥 스테이트를 무너뜨리겠다”는 글만 56차례 올리기도 했다. 트럼프 측근으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을 비롯해 ‘마가(MAGA)’ 지지자들이 이런 음모론에 불을 지폈고, 이를 트럼프가 선거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트럼프의 극렬 지지자들은 이런 음모론에 기반해 관료제 전반을 ‘느리고 까다롭고 비대한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대적인 해체 작업을 요구해왔다. 2기에도 다시 재무부 예산관리국장으로 지명된 러셀 보우트는 “관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 싫어질 정도로 그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기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 다시 등장한 ‘스케줄 F’ 공무원 대량 해고에 나서는 트럼프의 구체적 정책 수단은 행정명령 ‘스케줄 F’이다. 트럼프가 1기 종료를 앞두고 서명했지만, 바이든이 취임 직후 폐기했던 행정명령이다. 골자는 일반직 연방 공무원 가운데 고위직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정무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으로, 트럼프는 2기 취임과 동시에 ‘스케줄 F’에 다시 서명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스케줄 F’가 발효되면 우선 고위직 공무원 중 트럼프 정책에 반하는 이들은 당장 물갈이가 될 수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비벡 라마스와미를 공동 수장으로 앉힌 정부효율부(DOGE)가 이 작업을 주도할 예정이다. 트럼프는 해고 대상을 이미 제시한 바 있다. 미 사법 시스템을 무기화한 부패한 관료, 국가안보를 해치는 정보기관의 부패한 관료, 언론에 기밀을 누설하는 관료 등이다. 트럼프 취임과 동시에 DOGE가 해고 대상을 솎아내는 작업에 착수할 경우, 최대 10만명의 공무원이 한꺼번에 해고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 ━ 막무가내 공무원 해고 부작용은?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식 ‘불충’ 공무원 해체 작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정치학자 러셀 뮤어헤드와 낸시 로젠블럼은 트럼프식 관료 해체를 ‘언가버닝(Ungoverning·행정국가의 역량을 의도적으로 약화하려는 정치적 노력)’이란 개념으로 비판한다. 이들은 저서 ‘언가버닝’에서 트럼프식 공무원 해체 작업을 “전례 없는 급진적 실험”이라며 “행정국가를 무너뜨릴 경우 그 공백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국가 운영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트럼프 2기가 충성파냐 아니냐 잣대로 해고에 나설 경우 전체 관료 조직이 무너져 행정서비스에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해고 대상이 되는 고위 공무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도의 전문성이나 기술적 지식을 갖춰 당장 미국민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줄해고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난관이 적지 않을 거란 관측도 있다. 미 연방정부 인사관리국은 지난해 4월 임의로 정무직 재분류를 금지하는 내용의 공무원 보호 규정을 확정했다. 이를 폐기하고 스케줄 F 관련 규정을 새로 만들기 위해선 최대 6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스케줄 F 시행 직후 연방공무원 노조가 소송전에 나설 경우 연방대법원 최종 판결까지 1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정강현(foneo@jtbc.co.kr)

2025-01-19

[리셋 코리아] ‘87체제’를 넘어 새로운 헌정체제로

지난 1987년, 권위주의 정부를 청산하고 새 헌법 하에서 민주화가 되면 이제는 정상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민은 자기가 원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임기를 마친 성공한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다. 역대 대통령 중 세 사람이나 탄핵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직 대통령이나 퇴임한 대통령이나 잡혀가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전투적 국회와 대통령 정면 충돌 권력 분권해야 민주주의 완성돼 국민에 정치권력 견제 기능 줘야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그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껍데기만 민주화된 것으로 보일 뿐 국가권력은 여전히 집중되어 있고, 현실 정치나 국정에 참여하는 사람의 의식과 행태도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중심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폐단이 똬리를 틀고 있고, 사람이 바뀐다고 폐단이 고쳐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진단도 나왔다. 그 와중에 대선이나 총선을 검투사들의 대결쯤으로 보고 상대를 때려눕히기를 바라며 참여하거나 응원하는 사람들은 날로 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종전 국가정책을 다 뒤집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정부를 믿은 국민만 날벼락 맞듯이 또 온갖 피해를 뒤집어쓴다. 정치와 정부만 제 역할을 해도 경제, 과학, 기술, 문화, 예술 등등 많은 분야가 날개를 달고 날 수 있음에도 87체제의 실패로 한꺼번에 몰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민주화 이후에 정치나 국정에 참여해온 많은 사람까지 이런 나라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에 모두 공감대를 이루었다. 국가 실패의 근원적 원인이 되는 87체제부터 개혁하자고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궁극적 처방은 국가권력의 분권화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길이다. 분권화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수직적 분권화와 중앙정부 내의 수평적 분권화를 말한다. 수직적 분권화는 과감한 지방분권이다. 연방제에 준하는 지방자치와 그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수평적 분권화이다. 내각제도 한 방안이다. 또 다른 방안은 분권형 대통령제이다. 현재의 대통령을 4년 중임으로 직선하여 책임성을 부여하고, 기본적으로 국가원수(head of state)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다. 행정부는 총선 결과 국회 다수세력이 국무총리를 정하고, 국무총리가 행정 수반(head of government)이 되어 각 부 장관을 지명하고 행정부를 구성·운영한다. 외교·국방을 관할하는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도 국무총리나 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어야 한다. 행정부와 국회가 정면 대결로 치닫는 경우는 국민이 해결하게 한다. 그 방법이 건설적 불신임제와 국회 해산 제도이다. 국회 해산은 국무총리의 요청으로 대통령이 한다. 정부 불신임이나 국회 해산이 있으면 어느 경우에나 총선을 치러 국민의 심판에 따라 국회를 다시 구성하고 행정부도 새로 출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헌정개혁(constitution reform)은 다당제 정당체제,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의 확대, 정당의 정상화, 수월한 정당 창당, 지방 정당의 출현과는 자연스럽게 정합성을 갖출 수 있다. 시행 이후에는 현실에 맞춰 지속적인 제도 개선도 가능하다. 독일과 같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개헌은 국민투표로 정하되, 정치제도에 관한 개헌은 국회의 3분의 2 의결로 정할 수 있도록 개헌 방법을 연성화시키면 된다. 87체제를 넘어서는 헌정개혁의 개헌은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로 확정하거나 4년 임기가 같이 돌아가도록 2028년 총선 무렵에 해도 좋다. 다음번 대선에서 선출되는 차기 대통령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차차기 대통령부터 적용하더라도 헌정개혁을 해야 한다. 대통령제 하에서 전투적 국회와 대통령이 정면충돌하는 경우 해결방법이 없어 벌어지는 국가적 참사를 여러 차례 겪고도 국가혁신을 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 이제 헌정개혁에 국민이 일어설 때라고 본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것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종섭 전 서울대 법대 학장·헌법학, 리셋코리아 운영위원

2025-01-19

[김진수의 바이오 혁명] ‘크리스퍼 혁신’, 유전자를 고쳐 질병을 치료한다

환자의 DNA를 고쳐 질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2023년 말, 영국과 미국 정부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활용한 최초의 세포치료제, ‘카스제비(Casgevy)’를 승인했다. 이 치료제는 제약회사 버텍스와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개발한 것으로, 흑인 500명 중 한 명 비율로 발생하는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대상으로 한다. 이 질환은 글로빈 유전자 변이에 의해 적혈구가 비정상적인 C자 모양으로 변형되어 온몸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유전병이다. 그 결과 환자는 평생 심각한 빈혈 증상과 고통 속에 살다 대개 5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카스제비는 환자의 조혈모세포 DNA를 교정해 정상적인 글로빈 단백질을 발현시킴으로써 환자들에게 완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는 인류가 DNA를 직접 수정해 질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영·미, 첫 크리스퍼 치료제 승인 DNA 수정 치료 시대 진입 의미 한국에선 관련 임상시험 없어 혁신엔 지속적 투자·지원 필요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은 그 원인 유전자가 밝혀진 최초의 유전 질환이다. 현재까지 혈우병, 듀센 근위축증, 낭포성 섬유증 등 6000개 이상의 유전 질환이 보고되었다. 대략 50명 중 한 명의 신생아가 유전 질환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유전 질환은 치료제가 없어서 환자는 평생 고통받다가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유전질환자는 부모로부터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기도 하지만, 부모의 체세포에는 없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후자는 부모의 정자 또는 난자세포에 돌연변이가 새롭게 발생하여 초래되거나 환자의 체세포에 새로운 변이가 발생하여 초래된다. 돌연변이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 유전 질환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는 왜 발생하고 이를 피할 수는 없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돌연변이는 모든 생명체가 가진 숙명으로, 이를 피할 수 없다. 방사능·자외선·발암물질을 포함한 다양한 화합물들이 DNA에 변이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을 운 좋게 모두 피하더라도 세포 내에서 대사과정 중 자연 발생하는 활성산소에 의해 돌연변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세포 분열과 증식에 필요한 DNA 중합효소가 DNA를 복제할 때 수억 분의 1의 확률로 실수하기 때문에 저절로 발생하기도 한다. 돌연변이는 유전 질환과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생명체가 진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돌연변이가 드물기는 하지만 유전자의 기능을 향상할 수도 있고, 특정 질병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돌연변이가 없다면 모든 자손이 부모와 100%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집단은 질병과 환경 변화에 취약해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다. 사실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조상의 돌연변이를 물려받아 생존하게 된 것이고, 새로운 돌연변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유전자치료는 유전 질환자에게 정상적인 유전자를 투여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혈우병을 비롯한 수십 개 질환에 대한 치료제가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 카스제비와 같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반 유전자 교정 치료는 이러한 일반적인 유전자치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전자치료는 결함 있는 유전자를 그대로 두고 정상 유전자를 추가로 환자 세포에 도입하는 방식인 반면, 유전자 교정은 손상된 유전자를 직접 고쳐 정상 상태로 복구하는 방식이다. 이를 자동차 수리에 비유하면, 터진 바퀴를 교체하지 않고 다섯 번째 바퀴를 추가하는 것이 전통적 유전자치료라고 할 수 있고, 터진 바퀴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유전자 교정이다. 카스제비는 후자의 접근법으로 높은 안전성과 치료 효율성을 입증하였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질환에 대해 수십 건의 유전자 교정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서 수행되는 임상시험은 없다. 질병에 강한 동·식물 만들 수 있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세균의 면역체계에서 유래했다. 세균은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크리스퍼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퍼는 세균 DNA 내에 바이러스 DNA의 조각이 일정 간격으로 삽입된 구조를 말하며, 이 조각들은 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했을 때 이를 기억해 공격하는 데 활용된다. 크리스퍼 시스템은 카스 단백질과 작은 가이드 RNA 분자들의 협력을 통해 바이러스 DNA를 절단하며, 세균을 보호한다. 2012년, 제니퍼 다우드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교수팀은 크리스퍼 시스템을 이용해 시험관에서 특정 DNA를 절단할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이 기술이 인간 세포의 유전자 교정에도 활용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 2013년 1월, 서울대 연구팀을 비롯해 미국 유수 대학의 연구진이 각각 독자적으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인간 배양세포에 도입해 유전체 DNA를 자르고 교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논문을 발표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동식물의 유전자 교정에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생쥐와 같은 실험동물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소와 돼지 같은 가축의 특정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질병 내성과 같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동물이 만들어졌다. 또한, 벼·옥수수·감자 등 농작물의 유전자에 변이를 도입해 질병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기초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다. 세균에서 유래한 단백질과 RNA 연구가 인간과 동·식물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혁신적 도구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혁신이 가능하게 하려면 기초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하다. ◆김진수=유전자가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2018년 ‘동아시아 스타 과학자 10인’중 한 명으로 꼽았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명공학기업 툴젠의 창업자이며, 서울대 교수와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유전체교정연구단장 등을 역임했다. 김진수 툴젠 창업자

2025-01-19

[김병필의 인공지능 개척시대] 숙고, 숙의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AI)의 가파른 발전은 올해도 이어질까. 쉽사리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답을 찾아본다면, 그 답은 아마도 ‘규모의 법칙’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규모의 법칙을 요약하면 AI를 더 크게 만들면 그에 비례해 성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 동안 AI 발전을 추동해 온 동력이 바로 이 법칙이었다. 2020년 오픈AI가 GPT-3를 발표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오픈AI는 종전의 GPT-2보다 용량을 100배 이상 키운 GPT-3를 개발했고, 비약적 성능 개선을 달성했다. 이후 AI 산업계는 규모 경쟁에 몰두해 왔다. AI를 더 큰 용량으로 만들고, 더 많은 학습 데이터를 더 오래 학습시켰다. 규모의 법칙이 잘 작동한 결과,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AI의 성능은 5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다. AI 성능 향상, 규모의 법칙 한계 여러 답 생성해 검증하는 ‘숙고’ 다수 AI 토론해 결론내는 ‘숙의’ 깊이 생각하는 미래 AI 나올 듯 하지만 문제는 규모의 법칙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규모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픈AI의 공동 창립자인 일리야 수츠케버는 이미 현재의 AI는 용량을 더 키우더라도 성능 증대 효과가 미미하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AI 발전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규모의 법칙은 끝나게 될까. 인간 수준 AI를 향한 낙관적 기대는 그만 접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규모의 법칙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규모의 법칙은 AI를 더 크게 만들지 않더라도, AI를 더 오래 실행시켜서 성능 향상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AI가 더 깊이 ‘생각’하게 하면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AI는 대부분 질문을 하면 곧바로 답을 생성한다. 마치 우리가 질문을 받았을 때 곧바로 떠오르는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잘못 답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질문에 대해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고 답하면 더 나은 때가 많다. AI도 마찬가지다. AI도 우리 질문에 곧바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랫동안 계산해서 답하면 답변이 개선된다. 얼마 전 개최된 미국 CES 박람회 기조연설에서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학습 단계를 넘어선 실행 단계에서의 규모 증대’라 불렀다. 나아가 그는 새로운 규모의 법칙이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전망했다. AI를 더 오래 실행시키면 어떻게 더 나은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전략이 있다. 하나는 ‘숙고’이고, 다른 하나는 ‘숙의’이다. 숙고는 한 질문에 대해 여러 답을 비교하여 가장 좋은 답을 고르는 과정이다. AI가 질문마다 단 하나의 답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가지의 답을 생성한 다음 가장 나은 답을 골라낼 수 있다. 또한 AI는 자신이 생성한 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오류가 없는지 스스로 검증해 보는 과정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적으로 거치면 복잡한 추론 문제에서의 성능이 적지 않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른 한편, 숙의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토론하여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AI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인간 요청에 대해 하나의 AI가 답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AI가 협업할 것이다. 각기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 특화되어 학습된 여러 AI를 활용하면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이용자가 질문을 하면 여러 AI가 상호 토론을 거쳐 합의된 결과를 출력하는 때가 올 것이다. 숙고와 숙의를 거치는 AI를 지금 당장 구현하기에는 여러 장애가 있다. 이용자 요청을 처리하려면 훨씬 더 많은 계산을 해야 하므로, 응답 속도가 느려지고 전력 소비도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AI 기술이 발전하고 반도체 성능이 개선된다면, 이처럼 숙고하고 숙의하는 AI의 발전은 이어질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AI의 발전 방향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과 비슷하다. 어떤 사회가 민주주의를 통해 좋은 결정을 하려면 구성원들의 숙고와 숙의가 모두 필요하다. 구성원 각각은 사회 문제에 관해 숙고하여 자신의 의견을 형성해야 한다. 나아가 여러 구성원이 함께 의견을 교환하는 숙의의 과정을 거쳐야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다양성과 협업의 가치를 존중함으로써 더 정확하고 사려 깊은 답을 찾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제껏 민주주의가 숙고와 숙의를 통해 번성해 올 수 있었던 것처럼, 미래의 AI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 갈 것이다.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 사회와 AI 모두 숙고와 숙의를 거쳐 더 현명한 답을 찾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2025-01-19

[신장섭의 이코노믹스] 환율, ‘시뇨리지’ 공신력이 좌우…투기 심리 잡아야 안정

경제 펀더멘털과 따로 가는 원화 가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올해 신년사에서 “지난해 900억 달러 수준의 높은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며 “경상수지 흑자 규모에 상응하는 자금을 외국인과 국내주식 투자자가 우리 주식시장에서 빼 나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원화 환율은 지난해 12.5% 올라 세계금융위기가 벌어졌던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연간 상승률을 보였다. 한국 경제의 지표는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원화 약세가 자꾸 벌어지나.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화 약세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경제 개발을 시작한 이후 지속해 온 추세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정환율제를 택하고 있던 1965년에 원-달러 환율은 연평균 267원이었다. 그 후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해 고정환율을 조정해 나갔고, 고정환율제를 폐기한 1980년에는 607원으로 올라갔다. 그 후에도 상승 추세는 이어졌고 1990년에 708원으로 올라간 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1399원으로 치솟았다. 그 후 하락세로 돌아서 2007년 929원까지 떨어졌지만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벌어지면서 2009년 1276원으로 올라섰다. 다시 안정세를 찾아 2018년 1100원으로 떨어졌지만,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당선에 따른 달러 강세와 계엄령 이후 정치 불안 등이 겹치면서 1364원을 기록했다. 900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에도 작년 원-달러 환율 12.5% 급등 외환시장의 몸통은 투기적 거래 실물 경제 관련은 2~3%에 불과 한국, 환율 안전 장치 강화하고 정치 불안 풀어 국가 신뢰 높여야 눈에 띄는 것은 원-달러 환율이 치솟은 뒤에는 과거 수준으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진정되며 떨어졌지만 2007년에 도달한 최저치 929원은 1995년 771원보다 높아졌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떨어진 2014년의 환율 1053원은 2007년 929원보다 또 높아졌다. 환율이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승한 것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계속 좋아져 왔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경제 펀더멘털은 외환 시장의 ‘꼬리’ 실제로 2000년대 한국 경제의 대외 금융지표는 눈부시게 좋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수지는 계속 흑자를 냈고 그 규모도 커지는 추세다. 2001~24년 사이에 1조880억 달러(약 1500조원)의 경상흑자가 쌓였다. 경상흑자가 누적되면서 대외금융자산이 가파르게 늘었다. 2001년 1771억 달러였던 대외자산은 2024년 3분기 2조5135억 달러로 14배 이상 많아졌다. 물론 대외부채도 함께 늘었지만 자산이 더 많이 늘었다. 만성 순채무국의 굴레도 벗었다. 2014년에는 순금융자산이 809억 달러를 기록하며 순채권국의 지위에 올라섰다. 순금융자산은 계속 늘어 2024년에 거의 1조 달러에 육박했다. 그러나 아무리 펀더멘털이 좋아져도 세계 외환시장 거래량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3년마다 발표하는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연간 외환거래량은 1875조 달러에 달했다. 하루에만 7조5000억 달러의 손바뀜이 이뤄진다. 이에 비해 상품과 서비스를 다 합친 세계 교역량은 32조 달러로 외환거래량의 1.7%에 불과했다. 2022년 세계 직접투자(FDI)액 1조3000억 달러, 국제대출집행 4조6000억 달러 등을 다 합쳐도 실물 경제 운용과 관련한 외환 거래는 전체 거래량의 2~3%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다 투기적 거래다. 전 세계 은행과 증권사, 펀드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외환을 거래한다. 나노초 단위로 이뤄지는 초단기거래 규모도 급격히 커졌다. 만약 경제 펀더멘털이 환율을 결정한다면 전체 외환거래량의 3%도 안 되는 금액이 나머지 97% 이상의 움직임을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3%가 정말 핵심적으로 중요해서 나머지를 다 결정한다는 설명을 내놓지 않는 한 믿기 어렵다. 오히려 97%가 나름의 방식에 따라 움직이고, 3%는 거기에 따라간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외환시장에서 펀더멘털이 ‘꼬리’고, 투기적 거래가 ‘몸통’인 것이다. 정치·경제·사회가 환율에 영향 그러면 외환시장의 투기 심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현대사회에서 화폐는 내재 가치가 없고 정부의 공신력에 의해 발행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금이나 은 같은 실물자산의 뒷받침 없이 대차대조표에서 숫자를 찍어 화폐를 그냥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돈은 이렇게 컴퓨터 안에서 영(零)원의 비용을 들여서 ‘창조’되고 지폐나 동전을 발행할 경우에는 그 제조 비용만 들어간다. 정부는 화폐 발행액과 발행 비용의 차익인 ‘시뇨리지(Seigniorage)’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시뇨리지의 공신력은 정부의 공신력에 따라 결정되고, 여기에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 변수가 다 포함된다. 환율 결정은 이런 화폐 공신력의 복잡성에 더해 이종(異種) 통화 간 교환이라는 성격이 추가되며 더 복잡해진다. 환율은 화폐와 화폐 간의 상대 가격이다. 절대 기준이 없다. 상대적으로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내가 잘해서 통화가치가 좋아질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더 못하거나 더 나빠지게 하면 내 통화가치가 강해질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미 달러화가 유로화보다 대폭 강세를 보였던 것은 미국이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 유럽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리면서 크게 나빠졌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환율 변동성 이용한 투기꾼 판쳐 한편 무엇을 잘해야 통화가치가 좋아지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굳이 답하자면 정치와 경제, 군사, 외교 등에서 다 잘해야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뒤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를 거의 공짜로 찍어내지만 다른 나라는 달러를 사야 한다. 다른 나라는 국내에서만 시뇨리지를 활용하는데, 미국은 세계적 범위에서 시뇨리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구축된 달러의 힘을 믿고 달러를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달러를 더 찍어내도 달러 가치가 유지되는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환율은 각 나라가 만들어내는 시뇨리지 공신력의 상대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이 통화 헤게모니가 없는 나라의 환율은 헤게모니 있는 나라 환율의 종속변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22년에 미국이 급격히 금리를 높이면서 원-달러 환율은 1430원을 돌파하고 1500선까지 위협받았다. 이때 한국 경제가 특별히 나빴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와중에 일본의 엔화가 크게 약세로 가고 중국 위안화까지 약세로 가며 원화도 따라서 약세로 간 것이었다. 환율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로 요동치기 때문에 외환시장은 그 변동성을 이용해 큰돈 벌려는 사람들에게 황금어장이라고 할 수 있다. 헤지펀드의 전설 조지 소로스는 환율 변동 가능성을 예측하고 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베팅한 방향으로 환율이 움직이도록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시장을 조작했다. 소로스는 1992년 유럽 통화위기 때 영국 파운드화에 ‘쇼트(short)’를 해서 10억 달러를 벌었고,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비슷한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다. 투기꾼 쪽박 차게 할 국가 역량 갖춰야 지금 국제금융시장에는 수많은 소로스의 후계자가 있다. 작은 약점이 보이는 나라가 있으면 대규모로 쇼트를 치며 그 나라 경제를 더 나쁘게 몰아넣는다. 그 흐름이 만들어지면 투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혹은 따라서 이익을 보기 위해 동참하며 판이 커진다. 한국과 같이 통화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나라들은 투기판의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흐름을 잘 타는 한편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투기 세력이 쉽게 달려들 수 없도록 심리를 다스리는 것이다. 원화에 잘못 투기했다가 ‘쪽박’ 찰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특별한 상황에서는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강한 프로펠러도 갖고 있어야 한다. 다른 큰 선박들이 유사시에 도와줄 수 있는 연대(連帶)도 중요하다. 지금 한국 경제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따르는 국제금융시장 변동성의 파고를 맞으면서 국내 정치 불안으로 인해 추가로 파고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치 불안이 더 나빠지지 않고 한국 경제가 잘 굴러간다는 신뢰를 만들어내야 한다. 한국의 정치와 경제 지도자들에게 무거운 과제가 지워져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2025-01-19

[중국읽기] BYD는 왜 쌀까?

싸다. 3000만 원 정도면 전기차 한 대 뽑을 수 있게 됐다. 주문 판매에 들어간 BYD 얘기다. 소비자들은 낮은 가격에 솔깃하고, 업계는 긴장한다. 중국의 ‘디플레 공습’은 이제 국내 자동차 업계를 겨냥하고 있다. ‘우리도 관세 장벽을 높여 시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제기된 중국 제품 관련 국제 무역 분쟁은 160건에 달했다(‘사우스차이나모닝 포스트’ 보도). 전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철강·전기차 등이 많았다. 미국·유럽연합(EU) 등 서방뿐만 아니라 인도·태국·페루·파키스탄 등 세계 전역 28개국에 걸쳐있다. 중국의 디플레 수출은 이제 지구촌 ‘공공의 적’이 됐다. 중국은 정상적인 무역 거래라고 주장한다. 기업 혁신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높였고, 그 기술이 해외 시장에서도 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조금에 대해서도 신생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어느 나라에서든 늘 있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경제·산업 구조 자체가 디플레를 양산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중국 제조업 붐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1990년대 가전 업계가 시작이었다. 백색 가전 수요가 늘면서 전국에 공장이 들어섰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찾아온 두 번째 붐은 건설 관련 산업에 집중됐다. 철강·시멘트·석유화학 등 분야 공장이 우후죽순 늘었다. 지난 2015년 마련된 ‘중국제조 2025’ 이후 세 번째 붐이 시작됐다. 전기차·배터리·태양광 등 신에너지 분야가 많았다. 지방 정부의 ‘공로’가 컸다. 주변 성(省), 도시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 된다 싶으면 달려들었다. 기업에 토지를 내주고, 은행 돈을 끌어왔다. 그래야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더 걷고,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빈약한 국내 수요다. 선진국의 경우 GDP에서 차지하는 소비의 비중은 70~80%에 이른다. 그러나 중국은 55% 정도에 불과하다. 사회 부(富)가 국가와 기업에 편중된 경제 구조 탓이다. 세계 제 2위 경제 대국이지만 그에 걸맞은 시장 규모를 갖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과잉 설비는 쌓여가고, 기업은 해외에서 소비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중국 제품이 항구에 쌓이면 해당 국가의 산업은 여지없이 타격을 받는다. 철강·석유화학·태양광 등의 분야에서 겪고 있는 일이다. 그 여파가 지금 우리 자동차 시장에 밀려오고 있다. 한국 소비자가 중국의 수급 불균형을 메워줘야 할 판이다. 서울 BYD 매장에서 말이다. 한우덕(han.woody@joongang.co.kr)

2025-01-19

[김병기 ‘필향만리’] 先事後得 非崇德與(선사후득 비숭덕여)

공자보다 36세 어린 제자 번지(樊遲)가 ‘숭덕(崇德)’ 즉 ‘덕을 높이 쌓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일을 먼저하고 이득을 나중에 챙기는 것”이라고 답했다. 흔히 ‘큰 덕’이라고 훈독하는 ‘德’은 ‘걸어갈 척(彳=行의 왼편)+직(直·올곧을 직)+심(心·마음 심)’으로 이루어진 글자로서 ‘올곧은 마음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공(功)이나 이득을 따지지 않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올곧은 일을 우선한 결과로 자연히 얻게 된 명예·지위·재산 등 모든 것이 바로 덕인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일 먼저, 얻기 나중’ 즉 ‘선사후득’을 숭덕이라고 했다. 후대 사람들은 ‘선사후득’을 달리 ‘선난후획(先難後獲, 획:얻을 획)’ 즉 ‘어려운 일 먼저, 얻기 나중’이라고 쓰기도 했다. ‘덕숭업광(德崇業廣)’이라는 말이 있다. ‘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확장된다’는 뜻이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을 격려하고 송축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다. 일은 제때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약삭빠르게 이익만 챙기려 들면 번창하기는커녕 망하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망한다. 선거철에는 선사후득을 외치지만 당선 후에는 이익에만 혈안이 되는 사람이 많다. 사람을 잘 고르고 잘 솎아내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5-01-19

[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아프리카의 예루살렘, 랄리벨라의 암벽교회

4세기경 악숨왕조가 기독교를 국교화하고 중세기에 시바 여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솔로몬왕계가 정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특히 자그웨 왕조의 랄리벨라왕(재위 1181~1221년)은 왕국을 번영시키고 기독교 문화를 꽃피워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가 금지되면서 랄리벨라왕은 그의 고향에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을 시작했다. 왕궁과 교회들의 도시를 만들어 수도로 삼아 ‘랄리벨라’라 이름했다. 해발 2500m의 화산암 고원지대인 이곳은 현재 작은 시골 마을이나 11개 암벽교회가 남아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다. 이 교회들은 응회암반을 파고 내려가 조각한 하나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들로 4만 명의 인력이 200년 이상의 시간에 걸쳐 조성한 대역사였다. 비에테(biete·집)라 부르는 교회들은 북부와 남부 두 영역에 모여있는데, 두 영역 사이에 ‘요단강’이라는 좁고 깊은 참호를 파서 경계를 이룬다. 모든 교회의 입구는 20여m 깊이에 있어서 이 요단강의 바닥이 주도로가 되어 교회들을 연결한다. 가장 오래된 마리아의 집, 왕궁 예배당이었던 임마누엘의 집, 세계 최대의 단일 석재건물인 구세주의 집, 쌍둥이 교회인 골고다 미카엘의 집, 그리고 베들레헴의 집 등이다. 신약성서의 지명과 인명으로 가득한 이 암반 교회의 도시는 곧 또 하나의 이스라엘이고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독립된 위치에 가장 나중에 조성한 ‘성 조지의 집’(사진)은 완벽한 십자가형 타워로 유명하다. 로마군인 출신의 순교자 게오르기우스를 기념하는 특별한 교회로, 그는 에티오피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참호로 내려가 터널을 지나 접근하는 이 교회의 내부 공간은 간결하나 프레스코 성화로 가득하고 높은 고창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충만하다. 지붕의 십자가가 바로 정면이 된 특이한 건축으로 현재도 에티오피아 정교회 최고의 순례 성지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2025-01-19

[신민영의 마켓 나우] 지금 원·달러 환율이 ‘뉴노멀’인지 모른다

현재 1460원에 달하는 원·달러 환율은 외환위기나 리먼사태 등 경제위기를 제외하고는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이다. 환율이 머지않아 2021년, 2022년처럼 달러당 1100원대나 1200원대로 안정되리라는 전망이 공감을 사는 이유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환율이 드라마틱하게 낮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의 한국 경제는 2020년대 초반과 비교해도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 급등은 크게 미국경제 호조로 인한 달러화 강세와 국내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2024년 평균 원·달러 환율은 1364원으로 2021년, 2022년에 비해 각각 19.2%, 5.6% 절하됐는데, 인덱스로 측정한 달러화는 2021년, 2022년에 비해 각각 9.0%, 2.1% 절상됐다. 국내 요인으로 인한 원화가치 하락분이 2021년 대비 10.2%, 2022년 대비 3.5% 남짓함을 말해준다. 국내 요인은 한·미 금리격차를 제외하면 구조적 변화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경제의 역동성이 지속해서 약화돼 잠재성장률 1%대의 늙은 경제로 추락했다. 중국의 전방위적 추격에 산업경쟁력이 포박당해 한국의 자존심인 메모리반도체조차 수익이 급감했다. 글로벌화 쇠퇴로 세계교역이 둔화하면서 수출 한국이 힘쓸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 데다 설상가상 계엄사태로 인해 개도국 낙인이 찍힐 가능성마저 커졌다. 경제적 관계를 통계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계량경제학에서는, 이러한 구조 변화를 국면전환이나 체계변환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레짐 스위칭(regime switch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분석한다. 즉, 중요한 경제 구조가 변화하면 이를 분석·전망에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본 한국경제를 둘러싼 몇 가지 구조변화가 단기간 내에 과거 모습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원화환율이 점차 아래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해도 하락의 속도와 레벨은 일반적 예상과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틀로 한국경제를 설명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원화 환율이 2020년대 초반 수준으로 되돌아가리라고 전망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위의 분석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면 국내요인을 뺀 대외요인, 즉 달러화 강세로 인한 상승분만큼만 하락할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한국 경제에서 레짐 스위칭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언제 있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나 판단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환율이 다시 큰 폭 떨어지리라는 전제하에 의사결정을 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금융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은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신민영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초빙교수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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