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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제주항공 참사'가 맞다

무안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여객기가 불에 타고 산산조각이 났다. 탑승자 181명 중 179명이 숨졌다. 언론은 처음 ‘무안공항 참사’라고도, ‘제주항공 참사’라고도 했다. 지금은 주로 ‘제주항공 참사’라고 부른다. 모두 ‘참사’라고는 했지만 지역명과 기업명을 두고는 정리가 덜 됐었다.   언론이 ‘사고’라고 하지 않은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에는 ‘우연’이란 의미가 깔려 있다. ‘참사’라고 불러야 사건의 책임 주체도 드러낼 수 있는 일이 된다. ‘참사’는 말 그대로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어서 사실을 더 적극 반영한 말이기도 했다.   ‘무안공항 참사’라는 표현에는 지역명이 들어간다. 그 지역에 부정적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지역 혐오를 부추기게 된다. 대신 참사를 일으킨 기업의 책임은 감춰진다. 2007년 12월 7일 일어난 삼성중공업의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는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불렸다. 기업의 책임은 희석됐고, 지역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래서 언론은 대부분 ‘제주항공 참사’라고 한다.   ‘제주항공 참사’로 숨진 사람들을 가리킬 때는 ‘사망자’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한다. 사망자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이다. 희생자는 ‘어떤 일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거나 다치거나 피해를 본 사람’이다. 그들에게 희생자라고 하는 건 사전적 의미를 떠나 그들의 죽음이 개인적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다.   어떤 일에 대해 명칭을 붙이는 건 중요하다. 정확한 표현이어야 사실이 뒤틀리지 않는다. 올바른 명칭은 진실로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우리말 바루기 제주항공 참사 제주항공 참사 무안공항 참사 대신 참사

2025-01-07

[성서로 세상 읽기] '아나크리노'<'조사하다'는 뜻의 헬라어>가 필요한 시대

데이터와 지식의 과잉은 정보화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정보의 양은 폭증하고 업데이트의 속도는 가속화한다. 정보 과잉은 정보 피로 증후군이나 정보 강박 욕구를 가져온다.     정보 홍수와 과부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적 정보 접속으로 이어져 지적 지평은 외려 축소되고 사회적 소통은 갈수록 메말라진다. 수많은 정보에 노출된 결과, 결정 장애에 시달린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미시적 소담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사회 관계망은 계속해서 확대되지만 그 깊이는 얕아진다. 정보 과잉 시대에 무수한 청맹과니, 무지렁이, 어정잡이(겉모양만 꾸미고 실속이 없는 사람)가 양산된다.     17세기 독일 철학자이자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책이 쏟아져 나오는 양이 끔찍할 정도로 늘어나면 결국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그가 되살아나 현시대를 바라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회에 유포되는 다양한 형태의 허위정보는 정보전염병(infodemic)이 되어 혼란과 위기를 증폭하고 갈등과 반목을 조장한다.  정보전염병은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짝하여 우리의 의식과 영성을 지배하고 나아가 타인과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나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증거는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성을 이름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인 셈이다. 영국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이 1960년대 처음 정립한 심리 현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정치인, 관료, 기업인, 그리고 군중들이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과오를 저질러 왔다.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선택적 사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확증 편향이 조장되거나 확산할 경우, 사회적 증오를 넘어 집단 광기의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독일인들도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전선동에 넘어가 집단 광기에 빠져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광풍을 일으켰다.     “분노와 증오가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히틀러의 입을 자처한 희대의 프로파간다 괴벨스의 섬뜩한 말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이 이미 지닌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나아가 자기 확신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한방에 모여 떠드는 과정에서 그러한 공유 신념은 한층 공고해지고 확실해져 불변의 진리로 등극한다. 그 방에서 나와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어떤 사람은 불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분노한다.     각자가 속한 방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다.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20세기의 대표적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라고 주장한다.  균형 잡힌 신앙은 반성적 사고와 통전적 영성에 기대어 자란다. 자신이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반추 대신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증오한다.   사도행전에는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 칭찬하는 내용이 나온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여기서 ‘상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크리노’인데, 그 뜻은 ‘조사하다’이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로부터 들은 복음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조사했다는 뜻이다.     자신이 서 있는 믿음의 토대를 스스로 ‘상고’하는 태도, 즉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를 칭찬한 것이다. 성경을 상고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곡해를 걸러내어 정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맹신이나 확증 편향은 쉽게 자기도취와 자기해체로 이어지고 맹목적, 광신적 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확증 편향을 선동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된 우리 시대의 허위 정보와 사특한 이념을 경계해야 한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 읽기 헬라어 조사 정보화 사회 확증 편향 정보 과잉

2025-01-07

[기자의 눈] 자랑스런, 부끄러운 탄핵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의 탄핵 사태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공존한다.   주한미군으로 2차례 복무한 육군 중사를 최근 만났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 의식이 부럽다”며 한국의 탄핵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도자를 국민이 끌어내린 게 대단하다”며 “국민이 나서서 민주주의 절차를 주도해 이뤄낸 성과”라고 언급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탄핵 사태에서 자랑스러운 점이 있다면 전 세계에 한국 국민의 강력한 민주주의 의식을 보여주며 ‘국가=국민’ 공식을 증명해냈다는 것이다.     지난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이어 국민은 다시 한번 거리로 나왔다. 분노와 감정에 휩쓸려 강경한 시위를 펼치기보다, 아이돌 가수 응원봉을 들고 K팝 노래를 부르며 평화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국민의 품격있는 정치적 참여는 세계적인 주목을 모으기 충분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민주주의를 혼란에 빠뜨린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 탄핵안이 가결됐다”며 “시민들로 가득 찬 거리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워싱턴포스트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신호”라는 조앤 조 웨슬리안대학 동아시아학 교수의 분석을 전했다.   주류 언론들의 평가처럼 성숙해진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의식은 단순히 투표로 국민대표를 선출하는 수준을 넘어, 대표자들에게 지속해서 책임을 묻고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에 김상욱 국민의힘 의원을 비롯한 일부 여당 의원들이 응답했고, 결국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가결됐다.   반면, 자랑스러운 모습 뒤 부끄러운 그림자도 자리 잡고 있다. 탄핵은 극히 예외적이고, 중대한 사유에 한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야당은 헌법적 도구인 탄핵을 정치적 도구로 변질시켜버렸다. 이에 정치적 불안정성을 고조시키고, 외교무대에서 코리아 패싱 우려를 다시 한번 초래했다.   야당은 정치적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에 윤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탄핵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한 총리가 12.3 비상계엄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됐고, 양곡관리법 등 쟁점법안 6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아울러 한 총리는 특검법과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도 미뤘다.   하지만 설사 한 총리가 탄핵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해도 야당은 정부와 정치적 협력을 통해 국정 정상화를 이루고 정치적 대립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야당은 지속해서 선을 넘으면 탄핵하겠다는 등 한 총리를 향해 협박성 발언을 쏟아냈고, 결국 그도 탄핵했다.   이를 두고 AP통신은 지난달 27일 “두 명의 국가 최고위직 탄핵은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악화시키고, 경제적 불확실성을 심화하는 동시에 대외 이미지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 권한대행 탄핵은 정치적 혼란 해결 과정에서 한국 양당의 협력이 실패한 결과”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의 정치적 혼란이 깊어짐에 따라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신뢰도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한국은 ‘트럼프발 불안정성’을 걱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4년간 한미관계의 건전성을 확보하고 불안정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차기 트럼프 정부와의 물밑접촉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연속 2차례 탄핵으로 튀는 성격의 남의 나라 대통령을 걱정하다가 되레 얼마나 더 튈 수 있고 불안한 나라인지 보여주고 말았다.   이번 탄핵 사태는 국민 주권 실현의 계기가 됐지만, 동시에 탄핵이 정치적 도구로 변질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줬다.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이 대립 대신 협력을 통해 국정 안정과 외교적 신뢰 회복에 집중하길 기대한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탄핵 대통령 탄핵소추안 탄핵 사태 한국 국민

2025-01-07

[잠망경]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 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 있다. 젖먹이(영아)를 영어로 ‘suckling’이라 부르는 것도 태아의 본능적 행동의 연장선에서 비롯된다.   ‘fetus, 태아’는 전인도유럽어 뜻으로 ‘빨다, suck’였다. ‘affiliate, 제휴하다’와 동일한 어원이면서 ‘fellatio, 흡경(吸莖)’도 같은 말뿌리다. 어원학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게 낯뜨거운 배움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 5감의 발달과정의 선두주자는 단연 시각(視覺, visual sensation)이다. ‘Seeing is believing, 百聞이 不如一見’ 할 때의 바로 그 ‘seeing’. 고대 영어로 ‘see’의 원래 뜻은 ‘aware, 눈치 차리다, 인지하다’였다. 현대영어의 ‘I see.’도 알았다는 뜻이다.   우리말 ‘보다’는 다른 감각과 두루두루 섞여 쓰인다. 누구의 말을 들어볼 때는 청각과 시각이, 음식을 맛볼 때는 미각과 시각이, 무엇을 만져볼 때는 촉각과 시각이 합쳐지는 순간이다.   ‘보다’는 감각에만 그치지 않고 당신이 알게 모르게 아주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흉보다, 깔보다, 손보다, 돌보다, 해보다, 알아보다, 두고보다, 눈치보다, 물어보다, 노려보다, 쳐다보다, 바라보다 등등. 자칫 당신과 나는 보기만 하다가 볼 장 다 볼 것 같다. 또 있다. “언제 할래?”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이 나직이 하는 대답, “봐서…”는 어떤가.   요즘 유행하는 우리말, ‘비주얼(visual)이 좋다’가 있다. ‘보기 좋다’는 닝닝한 표현보다 훨씬 쿨하게 들리는 게 약간 이상하다. ‘visual’은 15세기 라틴어로 ‘시야(視野)’라는 뜻이었다. 불어에서 유래한 ‘visage, (문예체) 얼굴’, ‘visa, 비자’와 말뿌리를 같이한다. ‘vis-a-vis, 얼굴을 마주하다’는 아주 우아한 프랑스식 표현이다.   태아가 증여받는 ‘감각 프로토콜’의 시발점은 자기보존 본능에 입각한 시야 확보다. 생후 3, 4개월쯤 아기의 뇌에 엄마 얼굴이 각인된다. 그렇다. 당신과 내가 매달리는 가장 소중한 비주얼은 잔잔한 호수에 백조 두 마리가 물음표처럼 지루한 목의 곡선미를 보여주는 풍경화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 얼굴, 자신을 걱정스럽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 얼굴이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바라본다. 쳐다보는 시선은 날카롭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늘 부드럽다. 아이도 덩달아 엄마 얼굴을 바라본다. 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태학사, 1997)은 ‘바라보다’를 ‘바라다(望)’와 ‘보다’의 합성어로 풀이한다. 무엇인지 소망하는 눈빛은 따뜻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프로토콜 엄마 얼굴 시각 visual 태아 발달과정

2025-01-07

손원임의 마주보기- 노화와 우아한 삶(상)

어느덧 2024년, 갑진년인 청룡의 해가 지나갔다. 그리고 길거리와 상점들을 아주 예쁘고 화려하게 장식했던 다양 다색의 크리스마스 전구와 장식들도 또다시 연말을 기약하며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2025년, 을사년인 푸른 뱀의 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희망을 품고, 각자 나름대로 작성한 크고 작은 계획들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수첩에 올해의 리스트를 이것저것 끼적끼적 적어보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새해 들어 여러 기대들로 온통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괜스레 속상하고, 또 어디가 아프지는 않을까 하며 여러 가지로 불안과 걱정부터 앞서게 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즉 ‘노화(aging)’하면서 아주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우선 신체적으로는, 얼굴의 깊은 주름들과 수북한 흰머리는 당연하고, 온몸이 여기저기 쑤시며, 감각적 반응이 민감함과 둔함 사이를 수시로 오가고, 때로는 몸속의 내장까지도 갑자기 뻐근히 아파온다. 게다가 소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짐은 물론이다. 그리고 일단 멍이나 상처가 생기면, 유연한 몸을 가진 아이들처럼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어디 그뿐만인가? 견과류나 딱딱하고 단단한 음식을 씹다가 치아 끝이 ‘쩍!’ 하고 깨져 부러지기도 매우 쉽다. 사실상 평소에 자신이 즐겨 먹던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무척이나 속상하다.     내게도 벌써 두 번이나 일어난 일이다. 한번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afternoon tea, 즉 가벼운 식사 도중에 아몬드가 들어간 다크 초콜릿바를 한입 깨물다가 그만 ‘딱!’ 하는 소리에 매우 놀랐었다. 나는 그때 너트의 껍질 조각을 씹었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은 내 소중한 이 중 하나인 윗니 조각이 영원히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사람이란 결국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싶었다!’     여하튼 내가 지금까지 든 예들은 사람들이 노화 과정 중에 겪는 신체적 경험들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요점은 우리의 몸은 노화로 인해서 민첩함이나 회복력, 그리고 전반적인 생리적 반응이 한창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그 ‘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데에 있다.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는, 기억력과 전반적인 인지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꿈자리가 사납고, 죽음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게다가 심적으로는 친구, 가족과의 이별과 사별 등을 경험하는 가운데 더 더욱 ‘인생지사 새옹지마’의 뜻깊은 의미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지혜가 쌓여 남에게 조언을 주고, 존경도 받고, 품격을 갖춘 인격자로 성숙한다. 또한 호르몬의 변화로, 살아 생전 전혀 눈물을 안 흘릴 모순투성이의 막장드라마를 보며, 억장이 무너지도록 슬퍼서 하염없이 흐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감수성의 변화로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예민해지고 화를 내며 날카롭게 성질을 부리게 된다. 게다가 타인의 간섭과 잔소리를 너무나 듣기 싫어하며, 자신의 주관을 절대 굽히지 않고, 마냥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쓸 데 없는 고집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심약해지고, 매사에 겁과 두려움도 많아지고,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고 신경질적이며, 더 나아가 때로는 다혈질적인 성향까지도 매우 짙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노화 스트레스와 건망증에 치매 걱정은 말할 것도 없다.    나도 얼마전 노화에 따른 새로운, 그것도 아주 “찐” 경험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너무나 엄청 울었다. 생전 처음 잇몸이 엄청 많이 부어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서 심지어 의사 앞에서 창피하게도 엉엉 울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정말 크게 소리 내어 많이 울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항생제에 새삼스럽게 심한 부작용을 겪었고, 며칠 후에는 무슨 이유인지 입조차 제대로 벌릴 수가 없어서 밥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도 입안에 넣고 먹기가 어려워 무척 고생을 했다. 〈〈〈결국에는 참다 못해서 온라인으로 검색해보니 “손가락 세 개를 입에 넣을 수 없으면 심각한 문제!”라고 해서 겁도 상당히 많이 났었다.〉〉〉 이제는 괜찮아졌지만, 정말이지 ‘아프면 세상만사 싫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잇몸이 많이 약해진다는 것을 제대로 직접 몸으로 100퍼센트,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것이다. 다시 되돌아보면, 정말이지 참으로 우아하지 않았고, 세상없이 겸연쩍으며, 속상했던 기분이 든다.〈계속〉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 노화 노화 스트레스 얼마전 노화 노화 과정

2025-01-0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허투루 살지 말기

절망이 나락으로 바뀌면 끝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나락은 지옥을 뜻하는 불교식 용어로 밑이 없는 구멍이다. 나락은 산스크리트어인 “나라카(Naraka)”에서 유래했는데 불교의 여러 지옥 중 하나다. 죄를 짓고 심하게 괴로운 세계에 태어난 중생이나 그런 중생이 사는 곳으로 철위산의 바깥 변두리 어두운 곳에 있다고 한다.   나락은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나락(奈落)으로 떨어졌다’는 표현은 절망적이고 극한 상황에 처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절망이 생을 나락으로 몰고가도 밧줄을 부둥켜 잡고 있으면 밑바닥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아둥바둥 부대끼며 살아도 포기하지 않는 용기, 오늘을 버티면 내일이 올 것이란 믿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고난의 끝이 보인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도 살기로 작정하면 살아남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지푸라기 잡을 힘이 있는 한 어떤 불행과 고통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치 못한다. 체념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면 살아 남는다.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 살아 있는 모든 것, 마주하는 사람들의 정겨운 눈망울, 드라이브에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워주는 다정한 이웃,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순간들은 작은 기적의 징표다. 기적은 기적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크고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살뜰하고 정겨운 만남으로 매일 일어난다.   ‘허투루 살지 않기’가 새해 좌우명이다. 아무렇게나 되는 데로 살지 않기로 한다. 인생 후반부에는 바겐세일을 기다릴 시간 없다. 사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덧셈보다 뺄셈을 잘 하는 것이 인생을 수월하게 만든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바보짓이다. 서두르지 말고 주저하지 않고 말 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고백하고, 형편 될 때 가족 친구 이웃들과 밥 한끼 나눠 먹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자식에게 재산 줄 생각 말고, 나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고,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 만들어 실행에 옮기는 것이 정답이다.   그동안 잊었거나 미뤄왔던 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근차근 메모지에 적는다. 겨울학기에 컴퓨터 클래스와 영작문법에 수강 신청을 했다. 젊은 애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공부하면 사그러지는 청춘과 열정이 다시 용솟음칠지 모른다.   미국 국민화가 그랜마 모지스는 78세에 그림그리기를 시작해 1600여점을 그리고 250점은 100세가 넘어 완성했다. 내게도 충분히 도전 할 시간이 남아 있다.   외국에 오래 살면 한국어도 아리송하고 영어도 잘 못해 외계인 취급 받는다. 무식이 유식을 이긴다. 세월이 가면 유식도 무식의 반열에 오른다. 모르면 밀린다. 자식에게 밀리고 나이 때문에 밀린다. 미룰 시간의 여유가 없다.   허투루 살면 뒤죽박죽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산다. ‘허투루란 ‘남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 꾸며, 상대를 속이는 뜻으로 사용된다.   세상 모든 사람을 속여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살면서 제일 슬픈 일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냉장고에 남은 음식은 먹기 싫으면 과감하게 버리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고,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과는 작별하고, 나를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에 올인하며, 푸른 뱀띠 해를 싱그럽게 시작할 작정을 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불교식 용어 인생 후반부 눈망울 드라이브

2025-01-07

[사설] 최상목 대행 고발에 탄핵 협박까지…민주당의 고질병

━ 경호처의 체포 방해 행위 방조했다며 고발 ━ 정부 무력화 멈추고 경제 살리기 협력해야 더불어민주당이 어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을 경찰 국가수사본부에 고발했다.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방해한 경호처를 방관했다는 이유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직무유기, 특수공무집행방해의 방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이재명 대표는 “제2의 내란 행위”라고 했고, 추미애 의원은 “탄핵까지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지난 3일 윤 대통령 체포에 실패한 것은 경호처가 물리력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경호처의 체포 방해를 만류해야 할 최 대행이 소극적 자세로 일관한 점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이를 이유로 최 대행을 고발·탄핵하겠다는 민주당의 협박은 지나치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을 탄핵소추하자마자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헌법재판관 3명 임명을 요구하며 탄핵 카드로 압박했다. 한 총리는 여야 합의를 요청했으나 민주당은 탄핵소추로 한 총리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뒤이어 권한대행을 맡게 된 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서도 같은 압박을 했다. 최 권한대행이 일부 국무위원과 여당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2명의 재판관을 임명하자 잠시 탄핵 협박을 접었으나, 윤 대통령 수사가 지연되자 습관처럼 고발·탄핵 카드를 꺼냈다. 민주당의 연쇄 탄핵으로 국무위원 여러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행정부는 초유의 위기를 맞았다. 경제도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최 대행마저 무력화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나. 지금 입법부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그런데도 ‘수권 정당’을 공언해 온 민주당은 경제 살리기는 뒷전인 채 권력 다툼에 매몰된 모습이다. 국회는 오늘 양곡관리법 등 6개 쟁점 법안과 내란·김건희 여사 특검법 재표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여당 의원을 일부라도 설득하지 않고선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돌이표처럼 표결을 강행한다. 민주당이 윤 대통령 수사 차질을 비난하지만, 이렇게 된 데는 문재인 정부에서 강행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과 공수처 졸속 설치로 수사 체계에 허점이 생긴 탓도 크다. 수사기관이 엄밀한 방식으로 내란죄 수사를 진행하도록 여유를 줘도 모자랄 판에 탄핵 운운하며 수사 책임자인 공수처장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조급함은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 2·3심 판결이 나기 전에 대선을 치르려는 조바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윤 대통령에 대해 신속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민주당이 이 대표에게도 같은 잣대를 대야 국민이 수긍한다. 6개월에 끝내도록 규정한 이 대표의 1심 재판을 온갖 지연 전술을 동원해 2년 넘게 끌어놓고는 윤 대통령 수사는 닦달하고 있다. 내로남불 소리가 나올 만하다. 민주당이 나라를 생각한다면 탄핵 협박은 중단하고, 반도체특별법 등 시급한 법안의 통과를 위해 여당과 협의에 나서야 한다. 윤 대통령 수사는 수사기관에 맡기면 된다.

2025-01-07

[사설] 등록금 인상 무조건 막기 전에 대학교육의 질 고민해야

━ 17년째 동결 후유증…이대론 AI 등 고급 인재 못 키워 ━ 대학 구조조정, 초·중·고 중심 지방교육재정 개편 필요 서강대와 국민대가 2025학년도 학부 등록금을 5% 가까이 인상하기로 하자 서울 소재 사립대도 이에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09년 이후 정부는 대학이 등록금을 올리면 국가장학금(대학 연계 2유형) 사업 등에서 배제하는 식으로 동결을 유도했다. 보수·진보 정권 모두 같은 기조였다. 학생 부담은 줄었지만 대학 재정은 악화일로였다. 우수 교수를 영입하고 첨단 기자재를 도입해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는커녕 기존 시설을 개·보수하기도 어려웠다. “대학 시설이 초·중·고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급기야 올해는 대학들이 국가장학금 지원을 못 받아도 등록금을 올리겠다고 반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등록금 동결 원칙만 고수하고 있다. 올해로 17년째다. 등록금을 올리면 학생·학부모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 교육의 질이 나날이 추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적어도 법에 규정된 한도(올해 5.49%) 안에서 이루어지는 등록금 인상에 대해서도 불이익을 주며 동결을 유도하는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고급 인력을 키우는 것은 대학의 몫인데, 부실한 재정으로 어떻게 최고의 인재를 키워내겠는가. 국가 존망 차원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중·장기 대책도 필요하다. 경쟁력 없는 대학에 계속 재정을 지원할 수 없다. 줄어드는 학령인구에 맞게 대학 구조조정이 절실하다. 아울러 유치원과 초·중·고까지 아우르는 교육재정 개혁도 준비해야 한다. 지난달 31일, 고교 무상교육을 위한 중앙정부의 예산 분담을 2027년까지 연장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에선 시도 교육청의 예산으로 고교 무상교육을 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야당이 통과시켰다. 정부는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검토하고 있다. 고교 무상교육은 해야 하지만, 분담 비율은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감사원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초등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1.34배, 중·고생은 1.5배 수준이었다. 반면에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회원국 평균의 64%에 그쳤다. 대학엔 과소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내국세의 20.79%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조성돼 초·중·고 교육을 관장하는 시도 교육청에 배분된다. 세수 호전으로 교부금 총액은 2019년 55조원에서 2023년 75조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대학엔 쓸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청사 신축이나 초·중·고생, 교직원 대상 선심성 지출을 한다. 이젠 보다 넓은 시각에서 교육재정의 배분을 고민할 때가 왔다.

2025-01-07

[정운찬 칼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예외 없이 2024년 연말을 불안하고 짜증스럽게 보냈을 것이다. 느닷없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소동과 각종 탄핵소추에다 항공기 참사까지…. 오죽하면 설렘과 다짐 속에 맞아오던 새해를 을사년 대신 ‘을씨년’스럽다고까지 했겠는가. 곧 임기를 시작하는 트럼프 대통령 리스크와 북한 김정은의 지속적인 위협, 환율 급등과 소비 위축 등 위기의 한국 상황은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계엄·탄핵에 참사로 얼룩진 세모 정치권 혼란에도 한국 위상 여전 리더는 투사·반란자·성자의 면모 우리 각자가 백마 탄 초인이 되자 윤석열 대통령은 그동안 정정당당히 각종 조사에 임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려, 탄핵 재판을 늦추려는 꼼수 아니냐는 언론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탄핵이 소추된 마당에 스스로 각종 조사에 적극 응하고 탄핵재판을 빨리 받는 것이 도리다. 계속되는 야당의 각종 특검 요구와 국무위원급 인사 및 검사들에 대한 탄핵 공세로 야기된 국정 마비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지만, 이로써 비상계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방법이 나쁘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 후 우리가 피로써 지켜온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수사기관의 조사에 당당히 임하고 투명하고 적법한 헌법재판소의 재판에 순복하는 것이 자신이 불러온 국격 추락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국민 불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자중해야 한다. 이 대표는 22대 국회 들어 셀 수도 없이 많은 행정부 고위직과 자신의 수사 검사들에 이어 마침내 한덕수 대통령 직무대행까지 탄핵했다. 많은 국민들은 이 대표가 자신의 사법리스크가 현실화하기 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는 꼼수로 보고 있다. 그가 지지파들의 반쪽 대통령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면 법률과 규정에 따른 재판 일정에 정정당당히 출석해 재판받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지도자 이전에 한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거부하는 후보를 원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재명은 안됩니다’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겠는가. 정치권 특히 여야의 두 최고위층이 야기한 여러 문제에서 비롯한 혼돈과 혼란에도 한국의 위상은 세계인이 부러워하고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김주혜 작가의 톨스토이상 수상,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의 연주, 각 나라 사람이 따라 부르는 로제나 BTS의 노래, 심야에도 혼자 산책할 수 있는 한국의 치안, 외국인들이 맛과 건강한 재료에 ‘엄지 척’을 세우는 한식, 대부분 국가에서 품질을 인정받는 반도체와 자동차, 화장품, 그리고 질서 있고 친절한 국민성은 세계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찬사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자부심이다. 12월 계엄사태에 질서 있게 항의하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무안공항 참사에 보여준 위로와 격려의 공감 능력에 세계인들은 한국을 주시하며, 계엄사태 이후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결국 한국은 지도층, 특히 정치 리더들이 문제란 얘기다.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역사 리더십’을 가르치는 역사학자 모식 템킨(Moshik Temkin)은 최근 펴낸 『다시, 리더란 무엇인가』에서 역사 속 리더들의 특징을 분석하며 리더를 ‘투사, 반란자, 성자’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 남은 진정한 리더는 위기에 투사처럼 나서 정면으로 맞섰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반란자라는 비난을 들어도 협상할 줄 알았으며, 국가와 국민들을 보듬고 기꺼이 성자처럼 헌신하거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템킨 교수가 말하는 리더의 세 번째 덕목 ‘성자’, 특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란 설명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을 대혼란과 큰 위기에 빠뜨린 여러 사람들이 과연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끝에 이런 답이 떠올랐다. “그래, 모순이 극대화되고 파국에 다다른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리고 새 출발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 리 없다. 한 가지 방법은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남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소방관이 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지금 깊은 위기 속에서 정치라는 집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그 불을 끄기 위해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뒤로한 채 불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온몸으로 문제를 끌어 안고 희생할 난세영웅이 필요하다. 나는 어느 시대에나 백마 탄 초인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그를 맞을 준비를 하자. 그리고 우리 각자가 초인이 돼보자. 푸른 뱀의 해 을사년 2025년은 확실히 어려운 한 해가 되겠지만, 온 국민이 똘똘 뭉쳐 한국전쟁과 IMF 구제금융 위기 등 현대사의 국난 극복 경험을 되살려 내자. 2025년 세모에는 작년 말의 불안과 불확실성, 불신에서 벗어나 세계가 우러러보는 ‘도전과 응전의 롤모델’, ‘최고 품격의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을 되찾아오도록 우리 모두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매자. 바로 지금부터.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01-07

[안혜리의 시시각각] 완전히 망가져야 한다

분노를 넘어 좌절과 무기력을 겪은 지난 한 달이었다. 공공의 이익과 모순되지 않도록 권력을 행사해야 할 국가 최고 권력자가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시대착오적 계엄 발동으로 국가 안보와 민생을 순식간에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은 과정을 실시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윤석열 대통령의 셀프 쿠데타는 다행히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대통령이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금세 탄로 날 구차한 거짓말, 억지 궤변, 심지어 국민 갈라치기로 분열을 선동하는 여론전까지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걸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계엄 이후 첫 담화(12월 7일)에서 밝힌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건 아니다. 탄핵소추의견서 수령 거부를 시작으로 모든 법적 절차를 무시한 버티기에 들어가 영장 불복과 적반하장 식 고발로 이어지는 '법꾸라지'의 최고 기술 등을 구사할 거라는 건 사실 오히려 예측 가능한 행보였다. '이재명 포비아' 매몰된 국힘 보수의 품격 대신 뻔뻔함 택해 '카터 법칙' 기대할 수 있을까 다만, 새해 첫날부터 극렬 지지자를 향해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편지를 띄워 가뜩이나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은 이 나라를 더 갈가리 찢어놓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시민과 시민, 시민과 공권력, 공권력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불안을 가중해 대체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지 윤 대통령과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에서 보수 정치는 때론 권위주의적인 기득권 세력이라 비판받았을지언정 최소한의 품격이 있었다. 당장은 억울할지 몰라도 나라가 결딴날까 두려워 국민이 꾸짖으면 본인의 부덕을 탓하며 일단 고개를 숙였다. 지지자를 방패 삼아 자기 정치적 잇속만 차리는 위선과 몰염치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선이 이번 계엄을 계기로 무너졌다. 이유가 있다. 계엄 직후부터 친윤 핵심인 권성동 원내대표는 “우리도 뻔뻔해야 한다"며 "권력을 잃었을 때 더불어민주당의 극악무도한 행태가 가속할 것”이라고 했다. 보수층의 '이재명 포비아'다. 이후 대통령과 여당의 행보는 딱 권 대표 발언 그대로였다. 권력의 반성 대신 대중 선동, 국정 안정을 바라는 국민 대신 혼란을 틈타 정치적 반전을 노리는 대통령 지키기, 침소봉대로 본질 흐리기, 과거 발언 뒤집기…. 아마 적잖은 보수 지지층이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도저히 표를 줄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를 지금 보수를 참칭한 대통령과 국힘 의원들이 '이재명 포비아'를 무기 삼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때마침 이재명 대표는 계엄 전 입법독주는 저리 가라 할 대권 탐욕 아래 탄핵에 탄핵을 거듭하는 헌정 농단 횡포를 일삼고, 무능한 공수처는 제 실력도 모른 채 무리한 수사 욕심을 부리며 수사기관끼리 조율도 안 하고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에 나서 온갖 헛발질을 거듭한다. 이런 중구난방 덕에 위법한 계엄 발동이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탄핵 절차의 적법 논란만 남았다. 그 결과 정치에 과몰입한 양극단 세력은 사실상 정신적 내전을 치르고, 여기 속하지 않은 국민은 이 나라가 얼마나 더 망가질까 두려움에 떤다. 이러다 정말 나라 망하겠다는 공포에 휩싸이다, 문득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여야 불문 국민은 안중에 없이 나라가 만신창이가 돼도 자기 영달만 추구하는 정치인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에 거꾸로 국민은 각성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겼기 때문이다. 마침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최근 세상을 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빗댄 '카터 법칙(Carter Rule)'이다.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에선 근본적 변화를 이루려면 극심한 위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가령 1970년대 말 카터 정부의 무능에 대중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분노로 이어졌기 때문에 레이거노믹스의 번영이 왔다는 것이다.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을 때 비로소 국민은 "이제 그만"을 외친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상황이 좋아지기 위해 점점 더 나빠져 온 거라고 믿고 싶다. 안혜리(ahn.hai-ri@joongang.co.kr)

2025-01-07

정대철 "대선전 개헌, 野원로들도 동의…이재명 설득하겠다"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정대철 헌정회장 - 벽두에 개헌론 띄운 5선 원로 “대통령 탄핵 심판 전 개헌한 뒤 7공 신헌법 체제로 대선을 치르자.” 지난해 12월 31일 낮 여의도의 한 식당. 전직 국회의장·총리·당대표 12명이 모여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간담회를 주선한 정대철(81) 헌정회장은 “집권 가능성 높은 민주당 출신 의장·총리들조차 ‘개헌 후 대선’에 적극 찬성했다”며 “지금이 개헌의 유일한 적기”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정 회장은 “이 대표가 그제 전화했길래 만남을 제안하니 응했다. 곧 만나 개헌 동참을 촉구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출신 의장·총리들 공감대 이재명 회의론 극복, 개헌이 해법 윤, 선동정치 하면서 졸장부 전락 이제라도 석고대죄 자진 출두를” 전직 의원 90%가 이원정부제 찬성 Q : 개헌론에 침묵하는 민주당 현 지도부와 달리 민주당 원로들은 ‘대선 전 개헌’에 동의한 게 눈길이 가는데요. A : “김진표·문희상·정세균·박병석·이낙연 등 민주당 출신 의장·총리 전원이 ‘제왕적 대통령 37년의 결과가 계엄 아니냐’며 지금 바로, 즉 ‘대선 전 개헌’을 촉구했어요. 14일 열릴 2차 간담회엔 개헌안 발의권을 가진 우원식 국회의장도 참석해 점심을 낼 뜻을 밝혔는데 그 역시 같은 주장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Q : 개헌안의 골자는요. A : “헌정회(전직 국회의원 모임)가 지난해 5월 회원 1180명에게 바람직한 권력구조를 물었더니 이원집정부제가 90%, 내각제가 10%였어요. 이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책임총리에 분산하고, 고위 관료 임명권은 상원에 주는 양원제를 골자로 ‘원포인트’ 개헌을 추진키로 했습니다. 권영세·권성동 등 여당 지도부도 만날 뜻을 전해오는 등 적극적이에요.” Q : 개헌의 키는 원내 1당 이재명 대표가 쥐고 있는데요. A : “그제 이 대표가 내게 전화해 신년 인사를 하길래 ‘계엄 해제에 노력한 데 경의를 표한다’고 하니 ‘아이고, 큰 형님 고맙습니다’고 해요. 내가 ‘헌정회 간부들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세요’라고 해요. 곧 만나 개헌 동참을 촉구할 생각입니다.” Q : 지지율 1위로 대권을 눈앞에 둔 듯한 이 대표가 개헌에 응할까요? A : “탄핵 원하는 국민이 70%인데, 이 대표 지지율은 40%에 불과해요. ‘국민의 60%가 지지하는 개헌을 당신이 주도하면 박스권 지지율이 확 올라갈 것’이라 설득하면 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헌은 대통령 뽑은 뒤엔 못합니다. 5년 권력 내놓을 사람 있나요. 이번이 유일한 적기입니다.” 윤, “이재명 만나라”하니 침묵 Q : 이 대표가 ‘큰 형님’이라 부르는 사연은 뭔가요. A : “2007년 대선 때 정동영 후보 선대위원장을 지냈어요. 어느 날 정 후보가 변호사 한명을 데리고 왔어요. 그가 이재명이야. 그런데 얼마 뒤 선대위 간부들과 이재명 간에 충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선대위 부위원장 김한길(현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에게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했는데, 그분도 나서기를 꺼려요. 그래서 내가 직접 이재명을 간부들과 대질시켜 서로의 의견을 들은 끝에 이재명을 캠프에서 내보냈어요. 그런데 3년 뒤 지방선거에서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당선되더니 ‘식사 모시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내가 내쫓은 사람이라 주저했는데, 이재명이 ‘존경하는 선배님, 옛날 (악연) 싹 잊고 도와주십시오’라고 해서 한잔했어요. 맷집이 좋은 사람이에요.” Q : 민주당이 일방적 우위였던 박근혜 탄핵 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다른데요. A : “사법리스크 탓에 ‘민주당은 지지하지만, 이재명은 아니다’는 이가 오피니언 리더들은 물론 야권 지지층에도 절반이 넘는다고 여겨져요. 계엄 파동 직후엔 여권이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한덕수 권한대행 탄핵 이후엔 민심의 화살이 이 대표에게 돌아갔어요. 그 결과 대통령 지지율이 오른 거죠. 이 대표는 재판 지연 꼼수 대신 당당하게 법의 심판을 받는 한편, 개헌에 응해 나라의 미래를 위하는 정치인임을 보이면 돌파구가 열릴 겁니다.” Q : 박지원 의원은 “개헌론은 음모”라고 했는데요. A : “그제 통화했어요. 같은 동교동계라 반말하는 친한 사이죠. ‘개헌론이 음모라니’라고 따지니 ‘개헌으로 정치 일정을 지연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는 뜻이라길래 ‘헌정회가 추진하는 개헌은 음모가 아니잖나’고 하니 ‘그건 그래’라고 해요.” Q : 대통령의 계엄 파동을 평가하면요. A : “세계 10위권 선진국을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 건 윤 대통령의 책임이 절대적입니다. 국가 원수가 법적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선동 정치를 하며 졸장부처럼 변해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석고대죄하고 자진 출두해 수사받아야 합니다.” Q : 윤 대통령 재임 중 만난 적은요? A : “대통령이 취임 1년쯤 뒤에 저를 초청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과 관저로 갔어요. 대통령은 ‘민주당이 막 나가 골치 아프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나는 ‘이재명을 만나라. 아직은 무죄 추정 아닌가’고 조언했어요. 다른 얘기엔 다 답을 하던 대통령이 대답을 안 해요. ‘이재명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수십번 만났을 때는 말이 없던 사람인데 대통령 된 뒤 만나니까 말이 굉장히 많아졌더군요. 주변에 물어보니 ‘검사 시절에도 말이 많았는데, 정 회장님은 어려워서 말을 삼간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Q : 2016년 안철수 의원이 만든 국민의당에 합류한 뒤 윤 대통령의 정계 입문을 추진했었다면서요. A : “그때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 댓글수사 외압을 폭로한 ‘죄’로 대구고검에 좌천돼있었죠. 내가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널 추천했다’고 전화하니 ‘형님, 진짜요?’라고 물어요. ‘진짜’라고 하니 ‘그렇게 하세요’라고 응낙하더군요. 그런데 이틀 뒤 윤 대통령이 내게 전화해 ‘내 행동의 순수성이 망가지고 이상한 놈 될 것 같아 비례대표 안 받겠다’고 뒤집어요. 안철수 대표까지 나서서 설득했지만 90도로 절하며 사양해 무산됐죠.” Q : 윤 대통령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A : “내가 의원 시절인 90년대에 ‘서울 법대 후배인 검사 윤석열’이라며 연락이 왔어요. 막걸리 마시며 대번에 친해졌죠. 그가 검찰총장 됐을 때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덤비지 마. 성격이 보통 아니다’고 조언하니 ‘알겠습니다’고 해요. 나중에 ‘제 성질 같았으면 덤볐을 텐데 끝까지 참았습니다’고 하더군요.” “김부겸·김동연·김관영 주목해야” Q : 이대로 가면 민주당은 ‘어대명(어차피 대선 후보는 이재명)’ 아닐까요. A :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공천의 30~40%는 비주류에 줬어요. 주류가 망하면 비주류가 대안이 돼야 하니까요. 지금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가 ‘비명횡사’ 공천으로 비주류를 전멸시켰으니 문제입니다. 그래도 김부겸 전 총리와 김동연 경기지사가 대권 주자 가능성이 있어요. 둘 다 능력 면에서 이재명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아요. 김관영 전북지사도 유능해요. 이 대표가 혹시 못 나오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셋이 경쟁할 겁니다.” Q : 여당은 대권주자가 있을까요. A : “인물난이 심각해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을 (대권 주자로) 포섭 중이란 소리까지 들립니다. 그러나 그 당에도 유망주는 있습니다. 우선 한동훈은 정치 경험 없고 검사 출신이란 단점이 있으나 계엄 정국에서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줬고, 나이도 젊으니 대권 주자로 기대해볼 만합니다. 오세훈·홍준표도 괜찮은 후보들이죠. 또 지난 연말 별세한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상가에 갔는데 유승민이 보이길래 ‘당신, (대선 주자) 가능성이 있다’고 격려하니 웃으며 ‘아버지(유수호 전 민주자유당 의원)랑 정치하셨죠?’라고 해요. 유수호 선배는 13·14대 국회의원 동료였는데 틈만 나면 ‘이치 고뿌’(일본어로 ‘한 잔’)라 적힌 쪽지를 건네곤 해 맥주잔을 자주 기울였어요. 당은 달라도 의원들끼리 이런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서로를 적으로만 보니 정치가 전쟁이 된 거죠.” Q : 동교동계였지만 김대중(DJ) 정부에서 구속당하는 곤욕도 치렀는데요. A : “DJ 서거 1년 전인 2008년 그분과 나, 박지원이 부부 동반으로 DJ가 좋아하는 곱창집에서 만났어요. DJ가 거두절미하고 ‘이 사람, 미안해’라고 해요. 내가 DJ 정부 시절 (98년 경성그룹 불법자금 수수 의혹으로) 구속(최종심에서 무죄 확정)된 데 유감을 표한 거죠. 내가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까, DJ가 ‘자네가 (2002년) 대선에 나왔다면 노무현이 어떻게 대통령 됐겠나?’고 해요. 구속된 탓에 대선 출마가 봉쇄된 것도 안타까웠다는 얘기였죠. 또 DJ는 ‘자네는 통일에 관심이 많았으니 통일부 장관 자리 주려 했는데 왜 안 받았나’고 물어요. DJ가 취임 직후 외교안보 보좌진 A씨를 내게 보내 통일부 장관에 지명할 뜻을 전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나는 청와대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고 응낙할 뜻을 분명히 표명했어요.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더니 강인덕 전 중앙정보부 국장이 통일부 장관 되더군요. 그 얘기를 DJ에게 하니까 ‘뭐야! A는 내게 정대철은 그 자리 안가겠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는데’라며 ‘아뿔싸’를 연발하더군요.” 강찬호(stoncold@joongang.co.kr)

2025-01-07

기초연금 받는 92만명, 월 2만원씩 가족연금까지 받는다?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국민연금에 부양가족연금이란 게 있다. 잘 알려지지 않지만 246만8349명(지난해 9월 기준)이 받는다. 일종의 가족수당이다. 연금 수급권자에게 본인 연금 외 추가로 배우자·부모·자녀 부양가족연금이 나간다. 본인 연금 액수나 가구 소득과 관계없다. 보험료를 더 내는 것도 아니다. 자격만 맞으면 무조건 받는다. 1988년 국민연금 도입 때 복지 정책의 하나로 시행했다. 당시만 해도 복지라고 해봤자 의료보험·산재보험·생활보호제가 거의 다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고용보험·경로연금 등이 도입됐다. 부양가족연금 폐지론 대두 연금수급자 가족복지 기여 다른 혜택 생겨 상황 변화 "기초·가족 중복 먼저 폐지" 지난 37년 동안 나름대로 기여했지만, 2010년 이후 다른 복지가 많이 생겼고 연금 수급자가 늘었으니 이제는 부양가족연금(이하 가족연금)을 줄이자는 제안이 나왔다. 성혜영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5일 한국연금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가족연금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정부도 개선 방침을 밝혔다. 정부는 2023년 10월 국회에 제출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서 "인구와 사회 변화를 고려하여 가족연금의 효과를 점검하고, 합리적인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종합운영계획은 주변 여건 변화를 고려해 5년마다 제도를 개선하는 작업이다. 연금 수급자 36%가 받는 가족연금 가족연금은 연금 수급자의 36%가 받는다. 88년 연간 6만원에서 출발했고, 올해 배우자는 연 30만330원(월 2만5020원), 부모·자녀는 연 20만160원(월 1만6680원)이다. 매년 물가 상승만큼 올리지만 그리 많지 않다. 수급자는 배우자·고령자·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열 중 아홉이 배우자이다. 여성 비율도 비슷하다. 열 중 여덟이 60세 이상이다. 고령의 여성 배우자 복지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인 가구가 급증하고 국민연금이 성숙하면서 가족연금의 필요성이 떨어졌다. 2008년 연금 수급자 10명 중 여성이 3.9명이었고, 지난해 9월 4.7명으로 늘었다. 국민연금을 받게 되면 가족연금이 사라진다. 또 2010년 이후 복지가 급성장했다. 덩치 큰 것만 열거하자면 기초연금·노인 일자리, 노인 진료비 할인, 아동수당·가정양육수당·부모급여·자녀장려금 등이 있다. 월 437만원 벌어도 기초연금 받아 기초연금만 따져보자. 성혜영 박사 자료에 따르면 배우자 가족연금 수급자 중 기초연금을 받는 사람이 84만2271명(지난해 6월 기준)이다. 부모는 8만5596명, 자녀는 81명이다. 배우자 가족연금이 기초연금 최고액(34만2510원)의 7.3%, 부모는 4.9%에 불과하다. 기초연금은 설계가 허술하다. 노인의 소득 하위 70%가 기준이다. 기초 수급자 생계급여(기준중위소득의 32% 이하)처럼 분명하지 않다. 70%는 그대로 있지만 인원이 증가하니까 매년 선정 기준이 달라진다. 특히 소득·재산이 상대적으로 많은 베이비부머(1955~63년생)가 노인이 되면서 선정 기준이 가파르게 오른다. 올해 독거노인의 기초연금 선정 기준은 월 228만원이다. 이는 최저임금(112만원) 공제, 근로소득 30% 추가 공제 후 기준액이다. 이를 고려하면 독거노인의 경우 상시 근로소득이 월 437만원(다른 소득과 재산이 없다고 가정) 이하, 맞벌이 부부는 월 745만원(연 8940만원) 이하이면 기초연금을 받는다. 월 30만원 안팎의 기초연금을 받는데 2만원 안팎의 가족연금을 유지하는 게 맞을까. 2023년 가족연금 6699억원 들어 가족연금은 손이 많이 간다(행정 비용). 이걸 받던 배우자가 숨지거나 이혼(사실혼 파기)하거나 국민연금 수급자가 될 경우 골라내서 제외한다. 19세 미만 자녀가 받다가 19세가 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연금 수급권자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때만 지급한다는 규정에 따라 가출·실종자를 가려내야 한다. 결혼 전 배우자의 자녀가 있다면 주민등록이 같은지 확인해야 한다. "가족연금 줄여 연급수급권 확보에 쓰자" 효과는 생각보다 작은 데도 가족연금 지출에 2023년 6699억원(행정 비용 제외) 들어갔다. 성혜영 박사는 "가족연금 대상에서 배우자와 부모를 점차 줄여가되 기초연금 동시 수급자부터 제외하자"고 제안한다. 중장기적으로 신규 국민연금 수급자(유족·장애연금은 제외)의 부모 가족연금을 점진적으로 없애고, 65세 이상 국민연금 수급자 증가 추세를 고려해 배우자 가족연금은 일정 시점에 없애자고 한다. 자녀장려금이 적은 점을 고려해 자녀 가족연금은 유지한다. 일본·영국도 가족연금을 없애나가는 중이다. 성 박사는 절감한 재정으로 임의가입(전업주부 가입 등) 활성화, 연금 크레디트(출산·군 복무를 가입기간으로 인정) 확대, 저소득 가입자 보험료 지원 등에 써서 연금 수급권 확보를 돕자고 제안한다. "저소득층 고려해 신중한 접근" 지적도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송창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저소득층에게 월 2만~3만원은 작은 게 아니다. 가족연금이 사라졌을 때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같이 봐야 한다"며 "기초 수급자가 기초연금을 못 받는 점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중장기적으로 '1인 1연금(국민연금)'으로 가게 될 터이니 가족연금 폐지 방향에는 동의한다"며 "그러나 연금개혁이라는 큰 과제를 앞둔 시점에 가족연금을 줄이게 되면 '또 깎으려 하느냐'는 반발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가족연금 액수가 크지 않아 오히려 연금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흔들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생계에 보탬이 되는 저소득층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성식(ssshin@joongang.co.kr)

2025-01-07

[시론] 제주항공 참사, 이젠 철저한 진상 규명의 시간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7C 2216편 여객기가 비상착륙 도중에 발생한 대형 참사의 수습 작업이 마무리 단계다. 7일간의 국가애도 기간이 끝나고, 희생자 179명의 시신을 인도받은 유족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공항을 떠났다. 이번 참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소방·방재 측면에서 공항 자체 소방대의 대비 과정을 가장 먼저 주목했다. 그런데 이번 사고는 공항 관제탑이 “조류충돌(Bird Strike)에 주의하라”고 경고한 2분 뒤에 조종석의 ‘메이데이’ 선언, 다시 4분 뒤 비상착륙 과정에서 로컬라이저(Localizer, 방위각 시설) 충돌까지 총 6분 사이에 벌어졌다. 공항 소방대의 작전이 들어갈 틈이 없었으니 이번 사고는 재난 관리 체계의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 조류충돌 위험 대비책 마련 부실 ‘콘크리트 로컬라이저’ 충돌 참사 오락가락 국토부 국민 불신 키워 재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잘못된 별자리(Dis-aster)’다. 과거의 인류는 재난을 불가항력의 영역으로 여겼다. 하지만 첨단기술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의 인류는 재난을 다르게 바라본다. 미지에서 인지로 끌어들인 재난과학, 이를 활용해 인류를 보호하는 재난공학, 그리고 재난관리 체계도 가능해졌다. 재난관리란 발생 확률과 피해 심각도를 곱해서 리스크를 정량화해 이에 걸맞은 관리 수준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항공기가 조류 떼와 충돌하면 피해가 심각해질 수 있으니 발생 확률을 적극적으로 낮춰야 한다. 무안 공항 주변엔 조류 서식지가 네 곳이나 있다. 무안공항은 제주공항보다 조류충돌 발생 횟수가 12배 적지만, 항공기 운항 횟수는 80배가 적다. 발생 횟수가 적지만 운행 횟수가 더 적으니 발생확률이 7배나 높은 셈이다. 그렇다면 무안공항은 더 강력한 방지책을 갖춰야 했는데도 시설과 인력은 부족했고, 조류충돌예방위원회도 부실하게 운영됐다. 항공 전문가들은 사고 여객기가 조류충돌로 생긴 엔진 고장 때문에 랜딩기어를 펼치지 못하는 바람에 동체 착륙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물론이고 인명 피해가 이렇게 커진 이유는 지금부터 명백하게 규명해야 한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사고기 엔진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 연방항공청(FAA), 항공기 제조사(Boeing)도 조사에 참여할 것이라 한다. 국내외 전문가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무안공항 활주로 끝에 설치된 로컬라이저다. 로컬라이저는 계기 비행 항공기에 전파로 활주로의 중심을 안내하는 안테나 시설이다. 항공기가 활주로를 지나쳐 주행(Over-run)하는 경우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안테나 및 하부 기초는 쉽게 부서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무안공항의 경우 둔덕 속 기초가 2m 높이의 견고한 콘크리트 구조체로 만들어져 비상착륙한 항공기와 충돌하며 참사를 키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무안공항을 수년째 운항한 기장들조차 둔덕 속에 콘크리트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사고기 조종사도 그랬을 것이다. 조류충돌의 높은 확률은 간과됐고, 동체착륙 와중에 대형 충돌사고로 이어지게 했다면 재난관리의 두 축이 모두 무너진 셈이다. 제주항공의 운영 행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제주항공 7C 2216편 여객기는 사고 전 이틀 동안 무려 13차례 운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운행 횟수가 많은 데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섞어 운행한 것도 항공기에 무리가 따랐으리라는 것이 항공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해당 항공사는 국내 6개 항공사 중에서 여객기의 평균 운행시간 1위, 평균기령도 1위로 나타났다. 많이 날았고 오래된 항공기라면 더욱 철저한 정비가 필요한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항공기 1대당 정비사 수가 풀서비스 항공사(FSC)는 평균 16명인데 저비용항공사(LCC)는 평균 11명이다. 논란이 일자 처음에는 문제가 없다던 제주항공은 앞으로 항공편을 감축하겠다며 물러섰다. 무안공항을 관리하는 한국공항공사 사장은 8개월째 직무대행 체제다. 참사 직후부터 국토부는 사고 원인에 대한 해명이 명확하지 않았고, 로컬라이저에 대한 설명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국민 불신을 키웠다. 합리적 지적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앞으로 재난을 반복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백승주 열린사이버대 소방방재안전학과 겸임교수

2025-01-07

[장혜수의 시선] 골프 대통령, 조깅 대통령

사태가 터지고 한 달쯤 지나 돌이켜 보니 혹시라도 골프가 역린이었나 싶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 후 일련의 사태를 촉발한 바로 그 역린. ‘국익을 위한 거라는데, 감히 어디서’라고 격노한 대통령이 분을 참지 못한 끝에 결국 계엄 선포에 이르게 된 건 아닐지. 시곗바늘을 두 달 전으로 되돌려 보자. 지난해 11월 7일(한국시간)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했다. 이틀 뒤인 9일 윤 대통령이 서울 태릉 CC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졌다. 다음날(10일) “트럼프에 대비한 ‘골프 외교’를 위해 2016년 이후 8년 만에 골프 연습에 나섰다”고 대통령실이 해명하면서 별것 아닐 수 있던 일이 커졌다. 대통령이 골프 좀 칠 수도 있지, 굳이 트럼프로 둘러댈 일은 아니었다. 별세한 카터 “최고 전직 대통령” 평생 ‘국민만큼 좋은 정부’ 강조 새해 벽두 더 간절해진 두 가지 해명이 무색하게 트럼프 당선 전에도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골프를 친 사실이 드러났다. 잇단 거짓 해명에 여론이 악화했다.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나섰다. 그는 28일 국회에서 윤 대통령 골프는 “장병을 격려하는 자리”였고, “함께 라운딩한 부사관이 감격해 눈물을 글썽였다”고 주장했다. 비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었다. 닷새 뒤인 12월 3일 윤 대통령이 난데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골프를 치게 그냥 놔뒀어야 했다. 동반자와 필드를 걸으며 맑은 공기라도 마시는 게, 관저에 틀어박혀 극우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음주를 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 말이다. 대통령의 운동은 언론이 종종 다뤄온 주제다. 어릴 적 많이 했던 ‘관계있는 것끼리 선으로 잇기’를 한 번 해보자. 왼쪽에는 등산-테니스-야구-농구가, 오른쪽에는 김영삼-이명박-조지 W. 부시-버락 오바마가 각각 있다. 빙고. 서로 마주 보는 것끼리 이으면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산악회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하면 이른바 ‘황제 테니스’를 떠올리게 된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메이저리그(MLB)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 출신이고, 대학 농구선수였던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백악관 뒷마당에서도 농구를 즐겼다. 한때 ‘야구’ 쪽에 넣었던 윤 대통령을 이제는 트럼프 당선자와 같은 ‘골프’ 쪽으로 재분류해야겠다. 한국 언론이 단기간에 정말 많이 다뤘던 대통령과 운동이 따로 있다. 때는 46년 전인 1979년, 주인공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다. 그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일주일가량 국내 일간지에 실렸던 기사 제목 일부를 옮겨본다. ‘미 대사관서 16분 동안 조깅’ ‘카터, 조깅 불편 없다’(6월 25일) ‘카터 아침 운동에도 동서양 차이’(6월 26일), ‘카터는 스포츠를 즐긴다’(6월 29일), ‘카터가 몰고 온 조깅 붐’ ‘미 장병들과 새벽 조깅’(6월 30일), ‘새벽 병영서 달리기’(7월 1일), ‘비원서 6㎞ 조깅, 로절린 여사도 함께’ ‘함께 조깅할 걸 그랬다’(7월 2일) 등.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조깅이다. 근엄한 절대권력자 대통령만 보던 한국민에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른 아침부터 뜀박질한다는 건 마냥 신기한 일이었다. 방한 기간(6월 29일~7월 1일) 카터 대통령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얼마나 뛰었는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카터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조깅은 한국의 아침 풍경과 스포츠용품 산업 지형도까지 바꿨다. 지난달 29일(한국시간) 카터 전 대통령이 100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천수, 그 이상을 누린 게 어쩌면 평생 열심히 달린 덕분일지 모른다. 같은 날 무안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가려 그의 별세 소식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온전히 칭찬만 또는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양팔 저울에 올려 내려앉는 쪽이 그 사람 인생의 본 모습에 가까울 테다. 재임 기간 주한미군 철수 정책 추진으로 그를 향한 국내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남부(조지아주) 출신인데도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등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임기 중에 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데이비드협정과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을 끌어내는 등 지구촌 평화를 위해 달렸다. 퇴임 후에도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며 평화의 전도사로 활약했다. 그의 저울은 칭찬 쪽으로 많이 기울 것이다. ‘최고의 전직 대통령(The best ex-president)’으로도 불린 그는 누구나 ‘국민만큼 좋은 정부(A government as good as its people)’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피력했다. 2025년 벽두, 우리에게 가장 간절한 게 어쩌면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장혜수(hschang@joongang.co.kr)

2025-01-07

[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아세안은 경제 파트너와 경쟁자 사이…다가올 파도 함께 넘어야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수출, 2024년 실적은 어땠을까.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2024년 한국의 총 수출액이 6838억 달러에 도달하며, 사상 최대실적을 달성했다. 기존 최고 기록인 2022년 6836억 달러에서 2억 달러가 늘어난 수치이다. 수출 금액으로 세계 순위를 매긴다면 한국은 세계 6위에 해당한다. 아세안, 미·중 이어 3대 수출시장 자체 AI·데이터센터 육성 한창 경제위기 돌파할 협력 강화해야 최대 실적을 경신한 2024년 수출, 어느 국가에 가장 많은 실적을 올렸을까? 우리 수출 1위 대상국은 여전히 중국이다. 2위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3위는 아세안이다. 한국의 대 아세안 수출액은 1140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4.5% 증가했다. 미국과 중국에 비해 아세안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거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짐작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아세안은 16.7%로 중국(19.5%), 미국(18.7%)과 유사한 수준이다. 4위인 유럽의 비중은 10%에 그쳐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중국, 미국 그리고 아세안을 한국의 3대 주요 수출시장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아세안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유럽에 비해 중요도가 낮은 수출시장이다. 물론 아세안을 구성하는 10개 국가 모두가 중요한 수출 시장은 아니다. 아세안-6, 즉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등 인구 규모나 경제 규모에서 비중이 높은 여섯 개 국가가 주요 대상지이다. 이 중 한국 기업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베트남이 1위이고, 말레이시아와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주요 수출시장으로 부상한 아세안-6 3대 수출 시장인 아세안으로 향하는 한국의 수출 품목 1위는 반도체다. 베트남과의 교역에서도 반도체가 수출품목 1위를 차지한다. 석유제품 및 석유화학과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등 IT 제품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늘어난 이유는 아세안이 전기전자제품 생산 허브이자 수출기지로 부상하면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동남아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말레이시아는 세계 5위 반도체 수출국으로, 조립과 테스트, 패키징 등 후공정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싱가포르 역시 반도체 생산 거점 국가로서 반도체 칩뿐만 아니라 장비 수출에서 세계 시장의 20%를 담당하고 있다. 베트남도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투자를 발판으로 반도체 섹터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베트남 세 국가가 세계 반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2022년 기준)에 달한다. 미·중 무역갈등과 반도체 패권경쟁으로 인해 아세안으로의 글로벌 기업 투자가 증가했고, 공급망 참여도도 높아졌다. 아세안의 전기전자, 반도체의 대미 수출은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트럼프의 관세압박을 우려한 사전 주문 증가가 2024년 4분기 수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출 수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세안 각국이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AI를 국가 전략사업으로 지정하면서 자체 수요도 늘고 있다. 대 아세안 수출을 살펴보면 베트남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고 상위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다. 자본재와 원자재 비중은 높지만, 소비재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 안정화와 시장 다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한국과 아세안 경제협력 측면에서는 여전히 특정 국가와 품목에 집중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2019년 대 아세안 투자는 100억 달러를 넘기며 역대 최고를 기록한 이후 2022년 89억 1800만 달러, 2023년에는 약 74억 달러 수준으로 내려갔고, 2024년 3분기까지의 투자는 55억 6천만 달러에 그쳤다. 아세안도 첨단산업에 사활 걸어 베트남에 대한 누적투자액 기준으로는 여전히 한국이 1위이지만, 이 자리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아세안의 반도체, 데이터센터와 AI 허브를 놓고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베트남이 반도체와 AI 부문 연구개발 초기 투자 비용을 최대 50% 지원하는 법령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반도체 수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코트라의 ‘10대 수출 품목의 글로벌 경쟁 동향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과의 반도체 수출 경합도가 72.2를 기록했다. 대만과 싱가포르도 수출 경합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베트남이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등 첨단산업 육성에 국가의 사활을 걸고 있고, 중국과 대만 기업들의 해외 확장이 가속화된다면 경쟁 구도는 급격히 변할 가능성이 높다. 대외 환경 악화와 국내 경기 부진 상황에서 수출과 대외 경제협력 강화는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확실한 전략적 방안이다. 한국과 아세안은 2024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고 미래 협력을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의 해외진출 전략과 정부의 아세안 협력은 아직 균형감과 조화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는 다방면에서 협력방안을 제시하고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현장에서 체감하는 실질적인 지원이 미흡하다고 호소한다. 한국은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지털 헬스케어와 의료장비, 전력 인프라 등 아세안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 이를 지렛대 삼아 효과적인 협력 전략의 구도를 짜야 한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를 다시 상대해야 하는 2025년, 이는 한-아세안 파트너십을 더욱 강화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2025년, 한-아세안 관계가 경제적 동반자를 넘어 혁신 성장을 이끄는 핵심 파트너로 도약할 때다. ◆고영경=재무 전공 경영학 박사이자 아세안 경제·비즈니스 전문가다. 『아세안 슈퍼앱 전쟁』 『미래의 성장시장 아세안』 등의 저서가 있다. ‘아세안 워치’에서 현지의 최신 경제·산업 동향을 전한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01-07

[이은혜의 마음 읽기] 애도와 글

지난해 사위어가는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같이 나눠준 시인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를 나는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의식을 잃은 그는 시인의 글과 사진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세상과 저세상에 걸쳐 있는 아버지가 이리로 되돌아올 가능성은 없었으나, 글 쓰는 딸을 둔 덕에 그는 한 편의 시가 되어 병실 밖으로 나와 우리 사이를 걸어 다녔다. 연말에 그 아버지의 부고가 날아왔다. 나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곧 김유태의 시집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를 읽었다. 참사 앞에서 문학 무용하지만 죽음의 기록에서 사는 힘 얻어 충분히 애도해야 평화 찾아와 여기 담긴 시들은 여러 해 전 저자가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쓴 것이다. 불안의 풍경을 붙들며 그는 활자 속에서 미래의 죽음을 미리 떠돈다. 나는 저자의 어머니 또한 뵌 적 없지만 기록은 공동의 자산이므로 수십 편의 만가(輓歌)로 엮인 이 책을 나는 상가에 다녀올 때면 버릇처럼 펼친다. “시화(詩話)된 것 속에서 삶은 시를 통해 규정된다”고 벤야민이 말했듯, 나는 죽음을 노래한 그의 시에서 삶의 형태를 찾으려 애쓴다. 1년여 전 죽은 편집자 K는 내 책장 속에서 가장 강력하게 살아 있는 존재다.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골라내기 힘들 때면 K가 만든 것을 읽었다. K가 기획한 책이 인쇄되어 나오는 날이면 나는 서둘러 읽으려고 집에 달려갔다. “앞으로 다가올 삶과 이제 막 끝난 삶을 구분하는 어떠한 간격도 없다.” 이건 K가 기획한 로베르 에르츠의 『죽음과 오른손』의 한 구절이다. 이 책은 모던한 디자인인데, 내 것은 손때가 묻어 낡았다. 손때는 마음의 흔적이다. 시간은 언제나 정서와 함께 흘러가고, 정서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각인한다. K가 만든 이 책으로 인해 내 안에 수많은 죽음을 새겨넣을 수 있었다. 13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시신을 탑으로 쌓아 수많은 문학작품과 역사서를 탄생시켰다. 그중 병사들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곧 ‘현대의 탄생’이었음을 이론화한 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봄의 제전』은 뛰어난 학술 성과의 하나다. 엑스타인스는 어떻게 이런 연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 전쟁에 참전한 사람의 다수가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쟁터에서 주로 꺼낸 것은 노트와 펜이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도 1918년 전선에서 완성한 것이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60년대에 프랑스 문단을 풍미했던 누보로망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프랑수아즈 사강,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를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이유는 이들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는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 창작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뒤라스의 남편 로베르 앙텔므는 레지스탕스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었고 37㎏의 몸으로 귀환했다. 뒤라스는 남편을 기다리던 1943~1945년 일기를 썼고, 40여 년 뒤 이를 출간했다. 바로 『고통』이라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의 죽음을 침상과 거리에서 지켜보는 이의 고통이 흘러넘친다. 고통은 이따금 천재의 문장을 만들어낸다. 여기 담긴 단말마의 비명 같은 문장들은 죽음을 기록할 때 만연체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명과 울음은 짧고 높게 터져 나온다. 그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이 책을 1년 전 읽으면서 나는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고(故) 최유진씨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요즘은 고인을 무덤에 매장하는 일이 드물다. 사흘간의 장례식을 치른 뒤 죽은 이는 오히려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며 시시각각 함께한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죽기 전부터 기록을 하기 시작한다. 즉 수많은 작품은 죽음 곁에서 탄생한다. 그것도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다만 사회적 죽음이라고 명명할 만한 일들은 예민하고 첨예한 정서와 사고를 요구한다. 애도와 회고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단 하나, 기억뿐이다. 근래 몇 년 사이 한국의 시간은 죽음의 리듬을 따라 이어지곤 했다. 사회적 참사든, 대규모 사건 사고든 우리 목숨은 너무 싼 값에 치러지거나 혹은 사는 데 너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있다. 문학은 처참한 죽음 앞에서 쓸모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남긴 파편의 기록들은 한 죽음이 다른 죽음의 가장자리에 이어 붙여지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이들은 글쓰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곤 하며, 그 활자들이 리듬을 갖출 때 우리 사이에서 오래도록 공명하게 된다. 평화와 고요는 서둘러 찾아오지 않는다. “고통에겐 자리가 필요하다.” 뒤라스가 한 말이다. “슬픔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는 법이어서 목표, 기획, 계획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해도 실패하고 만다.” 이건 주디스 버틀러의 말이다. 슬퍼할 만한 삶을 살다 간 이들을 애도하며 시작하는 새해의 첫 달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5-01-07

[노트북을 열며] 갈라파고스 경호처

#1. “아니, 대통령께 급한 보고가 있어서 집무실에 가려는데 경호 때문에 얼마가 지체됐는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이 수석인 나를 모를 리도 없고.” 박근혜 정부 초기, 사석에서 만난 청와대 모 수석이 한 얘기다. 박 대통령을 급히 볼 일이 있어서 집무실로 향하는데 경호관들이 “연락받은 바 없다”며 제지한 뒤 꽤 오래 출입을 막더란다. 이 참모는 “이런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며 “위세를 과시하려는 것 말고도 실세를 파악하려는 의도 아니겠냐”고 말했다. 누가 몇 번이나 대통령을 만나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는 대통령과의 거리, 곧 권력의 잣대다. 경호실이 이런 정보를 수집하려 든다는 게 이 참모의 의심이었다. 이때는 이명박 정부 때 차관급인 처로 격하됐던 경호처를 장관급인 경호실로 되돌린 직후였다. #2. “형님이 제 경호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윤석열 대통령이 충암고 선배인 김용현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당시 김용현은 윤석열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됐다. 윤 대통령은 그러나 일찌감치 그를 경호처장에 내정했고, 청와대 이전 TF 팀장을 맡겼다. 박정희에게 박종규·차지철이, 전두환에게 장세동이 있었다면 윤 대통령에겐 김용현이 있었다. 실세 처장의 힘은 셌다. 군과 경찰 인사에까지 유·무형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자연스레 경호처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조직의 힘은 인사와 예산으로 가늠된다. 올해 경호처 예산은 2022년에 비해 421억원(43.4%)이 늘어난 1391억원이다.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을 경호처가 막았다. 군과 경찰이 관저로 향하는 길을 터준 상황에서 경호처는 윤 대통령 최후의 보루이자 갈라파고스 제도 같은 존재가 됐다. 법원이 “공수처의 체포·수색영장 집행을 불허해달라”는 윤 대통령 측의 이의 신청을 기각한 날, 박종준 경호처장은 “위법 논란이 있는 체포 영장 집행에 경호처가 응하는 건 대통령 경호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경호처의 존재 이유는 대통령 보위에 있으니 할 만한 얘기긴 했다. 그러나 다수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경호처는 ‘입틀막 경호’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강성희 전 의원, KAIST 졸업생 등을 네댓 명의 경호관이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고 자빠뜨린 뒤 끄집어냈다. “경호는 선진국을 가늠하는 척도다. 후진국일수록 경호실의 힘이 세고 통제 위주다.” 2008년 2월, 경호관 출신 첫 수장이던 염상국 당시 경호실장이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권호(gnomon@joongang.co.kr)

2025-01-07

[로컬 프리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확실한 입장 정리해야

대북전단 살포를 놓고 민민갈등까지 벌어졌던 북한과의 접경 지역에 최근 긴장이 다소 누그러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대북 단체들의 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1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 “대북전단 문제는 국민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상황 관리 노력을 경주해 나가고자 한다”며 “지난 12일 전단 단체들에 신중한 판단을 요청한 바 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북한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에 주력하겠다”라고도 했다. 2023년 9월 헌법재판소가 남북관계발전법상 대북전단 살포 금지 조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헌재 결정의 취지를 고려해 대북전단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밝혀온 통일부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실제로 파주·연천 등 경기도 접경지역에선 탈북민 단체 등의 대북전단 살포 행위 징후가 지난달 중순 이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접경지 주민들과 지자체는 안도한다. “정부의 이번 조처가 늦었지만 천만다행”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 변화가 대북전단 살포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차단 방법은 아니라는 점에서 긴장이 재연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며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한 대북 단체는 여전히 강원 고성군과 경기 파주시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할 움직임을 보인다. ‘평화와 연대를 위한 접경지역 주민·종교·시민사회 연석회의’는 지난달 20일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접경지역의 긴장 해소를 위해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있는 모든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24시간 이어지는 소음으로 일상은 무너지고 수면장애·난청 등 고통을 겪고 있다. 확성기 방송을 먼저 재개한 남한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멈춰야 대남 확성기도 멈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북 확성기 방송 즉각 중단 및 대북전단 살포 중단을, 국회에는 대북전단을 금지하는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을 신속히 논의해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김경일 파주시장도 “대북전단 살포 행위는 북한의 오물풍선과 확성기 공격에 빌미를 준다”며 대북전단 살포를 반대하고 있다. 접경지역 주민들은 국지전 발발을 우려하며 트랙터까지 동원해 대북전단 살포를 저지한 바 있다.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통일부의 입장 선회는 탄핵 정국 속 남북 긴장을 높일 수 있는 우발적 상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으로 관측된다. 접경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한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이다. 국가 전체의 안전 및 안보와도 직결되는 대북전단 살포행위에 대한 정부의 보다 확실한 입장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익진(ijjeon@joongang.co.kr)

2025-01-07

[비하인드컷] ‘에밀리아 페레즈’와 ‘오징어 게임2’

미국 골든글로브 최다 4관왕 수상작 ‘에밀리아 페레즈’가 구설에 올랐다. 성전환 수술로 새 삶을 얻는 멕시코 카르텔 두목과 그를 돕는 여성들을 그린 스페인어 뮤지컬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여배우들의 앙상블상을 받았다. 미국에선 지난 11월 넷플릭스로 먼저 출시됐는데, 이번 골든글로브 수상 결과에 반응이 극과 극이다. 호평과 함께 다문화·성소수자 소재 작품의 쾌거란 점에서 “(미국 차기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거대한 손가락 욕”(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이란 논평까지 나왔다. 반면, 이 영화가 “멕시코에 대한 모욕”이란 분노도 감지된다. 미국 매체 롤링 스톤의 이날 기사 ‘사람들이 에밀리아 페레즈에 화난 이유’에 따르면, 멕시코를 잘 모르는 프랑스 감독이 프랑스 세트장에서 마약 거래 등 멕시코 사회 문제를 소재 삼아 엉터리로 찍은 문화 도용이란 거다. 조연 셀레나 고메즈의 스페인어가 형편없고, 주요 출연진 중 실제 멕시코인은 한 명뿐이란 점도 비판받았다. 연출을 맡은 거장 자크 오디아르는 2015년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디판’을 비롯해 소외계층을 몰입도 높은 드라마로 담아온 감독. 그는 “자매애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연출 의도를 밝혔지만, 제작 과정의 미비로 일부 멕시코인들에겐 외국 감독이 창작 욕구를 실현할 무대로 자국을 이용했단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영화·드라마도 글로벌 감각을 재고할 때다. 베트남에서 논란이 된 ‘오징어 게임2’의 월남전 참전 용사 대사도 차분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원정(na.wonjeong@joongang.co.kr)

20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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