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 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 있다. 젖먹이(영아)를 영어로 ‘suckling’이라 부르는 것도 태아의 본능적 행동의 연장선에서 비롯된다. ‘fetus, 태아’는 전인도유럽어 뜻으로 ‘빨다, suck’였다. ‘affiliate, 제휴하다’와 동일한 어원이면서 ‘fellatio, 흡경(吸莖)’도 같은 말뿌리다. 어원학 공부를 하다 보면 이렇게 낯뜨거운 배움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 5감의 발달과정의 선두주자는 단연 시각(視覺, visual sensation)이다. ‘Seeing is believing, 百聞이 不如一見’ 할 때의 바로 그 ‘seeing’. 고대 영어로 ‘see’의 원래 뜻은 ‘aware, 눈치 차리다, 인지하다’였다. 현대영어의 ‘I see.’도 알았다는 뜻이다. 우리말 ‘보다’는 다른 감각과 두루두루 섞여 쓰인다. 누구의 말을 들어볼 때는 청각과 시각이, 음식을 맛볼 때는 미각과 시각이, 무엇을 만져볼 때는 촉각과 시각이 합쳐지는 순간이다. ‘보다’는 감각에만 그치지 않고 당신이 알게 모르게 아주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흉보다, 깔보다, 손보다, 돌보다, 해보다, 알아보다, 두고보다, 눈치보다, 물어보다, 노려보다, 쳐다보다, 바라보다 등등. 자칫 당신과 나는 보기만 하다가 볼 장 다 볼 것 같다. 또 있다. “언제 할래?”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이 나직이 하는 대답, “봐서…”는 어떤가. 요즘 유행하는 우리말, ‘비주얼(visual)이 좋다’가 있다. ‘보기 좋다’는 닝닝한 표현보다 훨씬 쿨하게 들리는 게 약간 이상하다. ‘visual’은 15세기 라틴어로 ‘시야(視野)’라는 뜻이었다. 불어에서 유래한 ‘visage, (문예체) 얼굴’, ‘visa, 비자’와 말뿌리를 같이한다. ‘vis-a-vis, 얼굴을 마주하다’는 아주 우아한 프랑스식 표현이다. 태아가 증여받는 ‘감각 프로토콜’의 시발점은 자기보존 본능에 입각한 시야 확보다. 생후 3, 4개월쯤 아기의 뇌에 엄마 얼굴이 각인된다. 그렇다. 당신과 내가 매달리는 가장 소중한 비주얼은 잔잔한 호수에 백조 두 마리가 물음표처럼 지루한 목의 곡선미를 보여주는 풍경화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 얼굴, 자신을 걱정스럽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 얼굴이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바라본다. 쳐다보는 시선은 날카롭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늘 부드럽다. 아이도 덩달아 엄마 얼굴을 바라본다. 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태학사, 1997)은 ‘바라보다’를 ‘바라다(望)’와 ‘보다’의 합성어로 풀이한다. 무엇인지 소망하는 눈빛은 따뜻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당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프로토콜 엄마 얼굴 시각 visual 태아 발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