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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말 잘하기와 경청의 힘

시끄럽기 짝이 없던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쓰레기처럼 더러운 막말과 욕설도 자취를 감추고 고운 말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누구나 말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말을 잘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흔히 미사여구를 현란하게 구사하며, 막힘 없이 재미있게 청산유수로 말하는 달변을 말 잘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매끄러운 말솜씨가 아니라, 말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어눌하더라도 진정성이 있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실제로, 말을 하면서 더듬거리거나 머뭇거리고 말을 끊는 등의 어수룩한 빈틈이 있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기억도 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거짓말처럼 무서운 살상 무기도 없다. 지금 우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거짓말, 몹쓸 말, 험상궂은 언어를 걷어내기만 해도 세상이 훨씬 평화롭고 조용해질 것이다. 어디 거짓말뿐이랴, 허언, 빈말, 말 바꾸기, 말 돌리기, 임기응변, 막말, 욕설, 험담, 비방, 중상모략, 악마처럼 떠도는 유령의 언어들, 무자비한 무기로 바뀌는 말들….   지금 우리 현실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출세한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익명의 누리꾼들, 특히 정치가들이다. 말싸움, 거친 말, 험한 말, 가시 돋친 말, 말도 안 되는 말, 선량한 동료 시민들 청력 테스트 등으로 날밤을 지새운다. 일부 언론은 그걸 앵무새처럼 받아 적는다.   이분들의 입을 정화할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발칙한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눈부시게 발달한 첨단과학을 활용해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간단하게 요점을 설명하자면, 거짓말이나 몹쓸 말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서 귀싸대기를 통쾌하게 후려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어서, 국회를 비롯해서 방송국이나 신문사처럼 말 많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다.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나서는 각설이 품바타령을 한바탕 시원하게 불러제끼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   제법 그럴싸한 생각인 것 같기는 한데,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워낙 거짓말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여기저기서 귀싸대기 후려치는 소리에, 얻어맞고 내지르는 비명으로 온 세상이 더 시끄러워질 것 같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속절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으니 참 답답하다. 제발 말싸움 그만하고 대화하시라, 마음에도 없는 말 마구 하지 말고 진심을 말하시라, 제발 남의 말을 경청하시라… 같은 속절없고 허망한 부탁의 말씀들….   그중에서도 가장 간곡한 부탁은 ‘경청’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경청이 최고의 웅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는 속담도 있고,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라는 명언도 있다. 묵언 수행의 의미도 무겁다.   철학자 한병철은 서사를 회복시키는 ‘경청의 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예로 든다. “소설에서 주인공 모모는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이끈다. 이를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심지어 사랑받는다는 느낌까지 받게 한다.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서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회복된 서사는 아픔을 치유한다.”   삼사일언(三思一言)도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말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는 이 말씀만 잘 지켜도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질 것으로 믿는다. 세 번이 어려우면, 단 한 번이라도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을 하시라, 그러면….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경청 막말과 욕설도 생각 하나 각설이 품바타령

2024-04-25

[뉴스 포커스] 대학생 시위대가 요구하는 것

‘월드 프레스 포토’라는 단체가 선정한 올해의 보도 사진상은 전쟁의 잔인함을 고발한 사진이다. 이스라엘군 폭격으로 숨진 5세 조카의 시신을 안고 비통해하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한창 어리광 부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이도 불쌍하고, 그런 조카를 그저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여성의 절망감도 안쓰럽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보복 공격이 6개월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사망자는 계속 늘어 집계된 것만 3만4000명이 넘는다. 가자지구 전체 인구가 200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주민의 2% 가까이나 목숨을 잃은 셈이다. 사망자 가운데 3분의 2는 여성과 아이들이라고 한다. 세계는 휴전을 바라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요지부동이다. 바이든 정부와 연방의회는 최근 260억 달러 규모의 이스라엘 지원법으로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요즘 전국 대학가가 난리다. 가자지구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 때문이다. 시위대라고 하지만 텐트를 치고 피켓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는 정도의 수준이다. 점거 사태도, 화염병도, 돌멩이도 없다. 그런데도 폭동진압 장비로 무장한 경찰들이 캠퍼스로 진입해 학생들 손목에 플라스틱 수갑을 채우고 있다. 경찰이 밝힌 체포 사유는 대부분이 ‘무단침입(trespassing)’. 학생들이 교내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데 ‘무단침입죄’라니…. 2024년의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맞나 싶을 정도다.   ‘경찰 교내 진입’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네마드 샤피크 컬럼비아대 총장이다. 지난 17일 연방하원 청문회에 출석했던 샤피크 총장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의원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이들은 “반유대주의 시위를 방관할 것이냐” “유대계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미흡하다”는 등 추궁성 질문을 쏟아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샤피크 총장은 경찰에 교내 진입을 요청했다. ‘친팔레스타인 시위대에 위협을 느낀다’는 구실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 책임자는 “학생들은 위협적이지 않고 해산 명령에도 질서 있게 따랐다”고 밝혔다고 한다. 경찰의 교내 진입 사태를 지켜본 한 교수는 “컬럼비아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후 학생 체포 사태는 뉴욕대(NYU), 예일대, 텍사스대,USC,에모리대, 에머슨 칼리지, 미네소타대 등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사실 이보다 앞선 지난 11일 포모나 칼리지에도 학교 측 요청으로 경찰이 교내로 진입해 20명가량의 학생이 체포된 일이 있었다.     대학 총장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샤피크 총장의 이번 처사는 이런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다. 교육자가 아니라 외압에 굴복한 직업인의 모습에 불과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이스라엘과의 협력 중단을 요구한 직원 수십명을 해고하면서 ‘비즈니스적 결정’이라는 변명거리라도 찾았다. 샤피크 총장은 수갑이 채워져 연행되는 제자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침묵하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유대인 학생들을 위해서는 이중, 삼중의 안전 조치를 요구하면서 경찰차에 실려 가는 학생들의 안전은 관심 밖인 모양이다.       일부에서는 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반유대주의 시위대’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구호나 피켓 문구 어디에도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단어는 없다. 그들은 ‘대량 학살 멈춰라’, ‘전쟁 중단하라’, ‘팔레스타인에 자유를’ 등의 구호와 함께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투자와 협력 중단 등을 요구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1980년대 한국에서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좌경·친북 세력으로 호도했던 것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대학 구성원들은 헌법적 권리인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우려한다. 디지털 세대라는 Z세대가 정치적 이슈에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동필 / 논설 실장뉴스 포커스 대학생 시위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 친이스라엘 성향 이스라엘군 폭격

2024-04-25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계획의 오류

헤비급 권투 세계챔피언이었던 타이슨은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한대 맞기 전까지는 다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자신과의 경기에 앞서 그럴싸한 작전계획을 이야기한 상대방선수에게 들으라고 했던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계획이 틀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나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하고, 상대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예전에 세운 계획들을 과연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때로는 아예 처음부터 맞는 계획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구소련의 작가다. 그는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지낸 자신의 경험을 소설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8년간 갇혀 지냈다. 그는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보낸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작업반장이 휘두르는 몽둥이로 단 한대만 맞아도 사라질 한심한 이데올로기”라고 그는 말한다. 감옥에 갇힌 그의 목표는 아마도 생존이었으리라. 아니 그냥 하루를 버티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음식과 물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사막 여행을 오래하던 그는 갑자기 성욕이 생겼다. 사막 한 가운데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그는 낙타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낙타의 뒤로 다가간다. 하지만 낙타가 자꾸 뒷다리로 차니까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던 차에 마침 저쪽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이 남자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음식과 물을 저에게 주시면 당신이 원하시는 무슨 일이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음식과 물을 그녀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저 낙타 뒷다리 좀 잡아주세요.”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세워진다. 하지만 목표라고 불변인 것은 아니다. 목표 또한 중간 중간에 계속 점검을 해야만 한다. 현재 목표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목표가 더 중요한 상위가치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재점검해야만 한다.       십 여 년 전에 결심하고 행동하려고 했던 항목들을 정리한 메모를 최근에 발견했다. 제목은 “손헌수의 행동 강령”이었다. 제목에서부터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거기 적힌 내용들 중에 얼마나 지키며 살았는지 살펴보니 한심했다.     강령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이 강령을 매일 읽고 이대로 행동한다.” 작성해 놓은 지 십 여 년 만에 처음 다시 들여다보는 걸 보니, 매일 읽기로 했던 강령을 어긴 것이 확실하다.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강령도 있다. 직원 분들은 알 것이다. 내가 저 강령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세금보고철을 지나면서 다음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항상 계획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김없이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믿을만한 직원들은 떠나가고, 더욱 특별한 손이 가는 고객들이 들어 온다. 그때마다 돌이켜 본다. 우리 회사와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보다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고객들의 만족인가? 성취감을 느끼는 것인가? 직원들 하나하나의 행복인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끼는 직원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내 곁에 두는 것이 목표인가? 효율성을 갖춘 팀을 완성하기 위해 악가지를 쳐내야 하는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에 두고 덜 중요한 목표를 점검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목표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들을 수정해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구멍가게라도 운영할 수가 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계획 오류 현재 목표 행동 강령 사막 여행

2024-04-25

[사설] 영수회담, 합의 가능 의제부터 찾아 국민 기대 부응하길

━ 상대가 수용 힘들 강경 요구만 고집해선 안 돼 ━ 정쟁적 사안 보다 민생 이슈부터 우선 다뤄야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 열릴 여야 영수회담이 준비 단계부터 순탄치 않다. 대통령실 홍철호 정무수석과 더불어민주당 천준호 대표비서실장이 23일에 이어 어제 두 번째 실무협상을 열었지만 별다른 진전 없이 헤어졌다. 민주당이 이미 여러 가지 요구를 전달했는데, 대통령실은 뚜렷한 검토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천 실장은 유감을 표시했다. 사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회담 준비가 순조롭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대선 때부터 이번 총선에 이르기까지 생산적 대화는 조금도 없이 극한 대결만 벌여 왔다. 선거를 여러 차례 치르면서 양측 진영 간 감정의 골도 워낙 깊게 패어 있다. 양측이 대화의 실마리를 찾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럼에도 22대 국회에서 여야가 협치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선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직접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의미 있는 합의점을 도출하는 첫 성공 사례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민주당에 당부하고 싶은 점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고 점령군처럼 대통령실을 몰아세워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채 상병 특검 수용, 거부권 자제, 국민 1인당 25만원씩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13조원 편성 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이 수용 가능한 부분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사안도 있다. 특히 1인당 25만원씩 현찰을 지원하자는 방안은 정책의 효과성도 의문인 데다 재정 악화, 물가 급등 등의 부작용을 고려하면 워낙 논란의 여지가 크다. 나중에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추진하겠다면 몰라도 경제 철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정부에 강요할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실도 최후의 마지노선을 제외한 나머지는 타협점을 찾겠다는 자세로 협의에 임하는 게 좋겠다. 좋든 싫든 간에 이번 총선 결과로 민주당의 도움이 없다면 윤석열 정부의 남은 임기 3년은 식물 상태가 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지 민주당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채 상병 특검은 이미 국민의힘 일각에서도 수용이 불가피하단 의견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영수회담이 성공하려면 조그마한 사안일지라도 서로 합의 가능한 의제부터 찾아야 한다. 또 정쟁적 이슈보다는 민생 분야에서 많은 대화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21대 국회가 문을 닫기 전에 처리해야 할 민생 법안도 수두룩하다. 특히 최대 현안인 의료계 파업과 관련해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한목소리로 해법을 찾아준다면 사태 해결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은 여권을 호되게 혼냈지만, 그렇다고 야당이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석을 주지도 않았다. 영수회담의 성공을 위해 양측이 반드시 되새겨야 할 총선 민의다.

2024-04-25

[사설] SK하이닉스 20조 국내 투자…국가 총력전 된 반도체 전쟁

━ 최첨단 공정의 생산기지 위상 지키는 데에 도움 ━ 설계, 소·부·장 스타트업 지원해 생태계 육성해야 한국 경제가 올해 1분기 1.3%(직전 분기 대비) ‘깜짝 성장’을 했다. 2021년 4분기 이후 9분기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수출·소비·건설투자 고루 괜찮았다. 경제 호조에는 반도체 경기 회복도 한몫했다. 어제 발표된 SK하이닉스 1분기 실적은 ‘어닝 서프라이즈’였다. 1분기 매출은 역대 최고였고, 영업이익은 시장 전망치를 40% 웃돌았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하며 D램을 쌓아 만드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이달 초 1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한 삼성전자도 전년의 10배인 6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우리 반도체 대표기업이 오래 지속된 하강 국면에서 벗어나 다행이다. 보조금 혜택을 누리고 대규모 수요처가 있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한국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충북 청주의 낸드플래시 생산기지에 20조원을 투입해 D램 공장을 짓겠다고 엊그제 발표했다. 낸드플래시 공장을 더 짓는 대신, 수요가 폭발하는 HBM 생산능력을 키우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대규모 국내 신규 투자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AI 메모리의 첨단 공정을 담당하는 반도체 공급기지로서 한국의 위상이 유지될 수 있게 된 점도 반갑다. 반도체 전쟁은 이제 국가가 전력을 다해 뛰어드는 총력전이 됐다. 생존을 위해 치킨게임을 벌여야 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기업에만 맡겨둘 일도 아니다. 도로나 철도 같은 사회간접시설(SOC) 인프라 구축이 정부의 역할인 것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산업생산의 인프라인 반도체의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미국·일본·독일 등이 공격적으로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뿌리며 제조 설비를 자국 내에 건설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조금 지원은 제조원가를 낮춰 반도체 기업의 투자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반도체 첨단공정의 국내 생산기반을 유지·강화하는 조건을 달아 우리도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 무엇보다 반도체 기술 격차를 벌리기 위한 차세대 기술개발을 정부가 도와줄 필요가 있다. 반도체 설계와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스타트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반도체 생태계 육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건설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속도를 내기 위해선 용수나 전력 공급 문제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울산시가 삼성에스디아이(SDI)의 양극재와 신형 배터리 공장 건립을 지원하기 위해 전담 공무원을 파견, 토지 수용과 인허가 절차를 2년 반이나 단축한 모범사례가 있다. 반도체 업계의 가려운 곳을 찾아 시원하게 긁어주려는 중앙정부의 적극 행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4-04-25

[중앙시평] 다양성을 인정해야 풍요로워진다

버스에서 공익캠페인을 본 적 있다. 피부색을 살색이라고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피부색은 개인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인종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우리 민족의 피부색을 살색이라고 한다면 우리 중심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일 수 있다. 이는 반세기 전이라면 나오기 어려운 얘기였다.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비극을 거친 후 내세울 것 없이 춥고 가난했던 시절엔 파란 가을 하늘과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게 위로가 됐었다.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면서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때는 외국과의 교류가 드물고, 외국인을 만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 안에 갇힌 상황에서는 베이지색을 살색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했다. 늑대가 있어야 사슴이 건강하듯 다름 인정·포용하는 사회가 건강 미래는 상호존중과 배려의 시대 다양성 품는 공존 확대해 나갈 때 이런 상황은 이제 전적으로 달라졌다. 지난 연말 방한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게오르기에바는 한국이 외국에서 더 많은 인력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구 감소에 대응해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조언이었다. 결혼이나 취업 등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은 지금도 많이 있으니, 우리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고 노령화로 인구 구조가 변화하니 외국 출신 인구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좋건 싫건 그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우수한 외국 인력을 유입하려면 이민 정책이나 사회 복지뿐 아니라 언어,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 통합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이걸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글로벌 악몽을 꾸어야 한다. 잘 대처하기만 하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약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왜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는가? 잠시 눈을 돌려 생명 세계를 보자.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살았던 늑대는 인간이 못마땅하게 여겼던 탓에 1926년에 멸종됐다. 포식자가 사라지면 초식동물의 평화로운 낙원이 펼쳐질 것 같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늑대가 사라지자 사슴이 증가했고, 이들이 풀과 낙엽 식물을 마구 먹어댔다. 숲이 황폐화하고 초목이 죽으면서 땅이 침식됐다. 물가의 나무가 사라지면서 비버도 함께 사라졌다. 가뭄으로 풀과 초목이 부족해지면서 사슴이 집단 아사하기도 했다. 서식 환경이 처참히 바뀌자 멸종위기종 보호법이 제정됐고, 1995년부터 30여 마리의 늑대를 캐나다에서 포획하여 옐로스톤에 순차적으로 방출했다. 그 후 사슴 수가 줄면서 공원의 식물군이 변하고 물가 식물도 살아났다. 이 식물로 집을 짓는 비버 수가 늘었고, 비버가 건설한 댐은 물속에 사는 여러 동식물의 서식처가 됐다. 이후 100여 마리의 늑대가 안정적으로 생존하면서 죽어가던 생태계는 이전의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는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초식동물만 있을 때 평화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겉모습일 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가 있을 때, 사슴도 오히려 건강할 수 있다. 다양성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한 공존이 이뤄지고, 이런 공존 위에서 생태계가 건강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여러 종류가 같이 있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슴과 토끼와 노루 등 여러 초식동물이 있다고 해서 건강한 게 아니라, 초식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육식동물이 필요하다. 유사한 종류의 다양성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다양성이 필요하다. 단일 혈통의 순수도 좋지만, 다양성을 포용하는 건강한 공존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덕목이다. 생태계와 달리 우리는 여기에 상호존중과 배려의 미덕을 추가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다른’을 ‘틀린’이라고 말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틀린(wrong) 것은 인정해야 할 다른(different) 것과는 다르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점점 더 서로 다른 인종적·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단정 짓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 문화 배경이나 신념 체계가 나와 다르다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늑대를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멸종시키는 것처럼 폭력일 수 있다. 다만 다를 뿐이니,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유네스코 국제미래교육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 ‘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에서는 “함께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다양성과 다원주의가 강화되고 우리 공동의 인간성이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비전으로 품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포용적이고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다른 문화와 인식체계, 생활방식과 세계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상호존중과 배려의 영역을 가족, 이웃, 소속 집단, 민족으로 한정하지 말고 인류와 생태계 전체로 확대하는 시대가 우리의 미래여야 한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2024-04-25

민주당은 공수처에 벌써 싫증 나나[강주안의 시시각각]

누가 뭐래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낳은 부모는 더불어민주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이후 17년의 산고를 거쳤다. 요즘 민주당의 공수처 홀대가 불편한 이유다. 공수처가 나름 공들여 온 ‘채 상병 사건’을 특검 대상으로 밀어붙인다. 수사기관 입장에서 중대한 사건을 빼앗기는 것만큼 허탈한 일은 없다. ━ 노무현 공약 이후 17년 만에 관철 지금까지는 검찰이 특검에 사건을 내줬다. 검찰을 불신하는 야당이 이를 주도했다. 한 건당 수십억원의 예산이 드는 특검 수사가 늘 성공적인 건 아니다. ‘특검이 성과를 내지 못한 데는 특검에 파견된 검사와 특별검사 사이의 갈등도 큰 몫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박준휘 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관한 연구』). 검찰과 특검은 천적 관계다. 공수처는 다르다. 검찰 견제가 목적인 기관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때 공수처법을 강행했다. 이에 앞서 노무현 정부는 17대 국회에서 공직부패수사처의 설치 법안을 제출했다. 18대 국회에서 비슷한 법안을 밀어붙인 것도 민주당이다. 지향점이 비슷한 특검에 공수처 수사를 넘긴다니 수긍이 어렵다. ━ 채 상병 수사 중인데 특검하자니 민주당의 찜찜한 속내가 짐작은 간다. 당초 공수처는 정치적 중립을 중시해 처장 인선에 야당이 비토권을 갖도록 설계했다. 과반 의석을 무기로 이를 무너뜨린 장본인이 민주당이다. 총 7명인 처장 후보 추천위원회의 의결정족수를 6명에서 5명(3분의 2 이상)으로 낮췄다. 야당 추천위원 2명이 반대해도 지명이 가능해졌다. 당시 야당이던 국민의힘을 강하게 압박했던 이해찬 전 대표 머릿속엔 “민주당 정부가 20년 정도 집권할 계획”이 들어 있었으니 여당 입장에서 만만한 공수처를 원했으리라. 그러나 5년 만에 국민의힘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민주당은 공수처장 후보자를 비토조차 못 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채 상병 사건처럼 ‘장성급 장교’와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 등 3급 이상 공무원’이 연루된 의혹을 수사하라고 만든 공수처를 두고 특검을 하겠다니 답답하다. 200억원 넘는 공수처 예산이 아깝지도 않나. 문 전 대통령이 “공수처는 대통령의 친인척과 특수 관계자를 비롯한 권력형 비리에 관한 특별 사정 기구로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2019년 국회 시정연설)고 밝혔듯 수사 범위는 꽤 넓다. 대통령의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등을 포함한다. ━ 여당서 야당 되니 생각 달라졌나 막대한 돈이 드는 특검을 주장하기 전에 공수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민주당의 도리다. 처장 인사 비토권을 없앤 게 후회된다면 이제라도 후보 추천 의결정족수를 6명으로 환원하면 된다. 공수처법 개정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은 강력히 반대했기에 이제 와서 야당 비토권을 거부할 명분이 없다. 민주당에선 지난 2월 처장 후보 두 명이 추천됐는데도 지명을 미루는 윤석열 대통령을 탓한다. 김영배 의원은 “지금 공수처가 처장도, 차장도 없는 비정상적 상태이고 특히 윤 대통령이 공수처를 무력화하려는 모습이 계속 노정됐기 때문”이라며 “이제라도 공수처 수사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그걸 중단시킬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채 상병 사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수사와 관련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는지가 쟁점이다. 이 과정에 대통령실이 개입했는지 밝히면 된다. 공수처는 이 전 장관을 출국금지해 호주 대사로 임명된 그와 현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민주당으로선 큰 신세를 진 셈이다. 이제 막 관련자 소환을 시작한 공수처를 외면하고 특검을 추진하는 건 옳지 않다. 민주당에는 한 해 200억원을 쓰는 공수처를 궤도에 올려야 할 책무가 있다. 지난해 사퇴한 검사 출신 김성문 전 공수처 부장은 “공수처 근무 기간은 공직생활 중 몸은 가장 편했던 반면 마음은 가장 불편했던 시기였다”고 털어놨다. 마음이 불편한 건 그렇다쳐도 “공직 생활 중 몸은 가장 편했다”는 대목에서 내가 낸 세금이 떠올라 몹시 화가 난다. 강주안(jooan@joongang.co.kr)

2024-04-25

[시론] 70년 사이 소비 230배, 플라스틱세 어떨까

하루가 멀다고 미세플라스틱 관련 뉴스가 보도된다. 생수 페트병에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종이컵 속 비닐코팅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떨어져 나온다는 충격적 조사 결과도 있다. 식물의 뿌리를 통해 흡수된 미세플라스틱이 과일과 채소에서 검출되고 있다. 심지어 환자의 혈액 속으로 주입되는 수액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나오고 있다. 일회용 컵이나 포장재·배달용기 등 일상의 플라스틱 소비는 인체가 플라스틱에 노출되는 출발점이다. 유출된 플라스틱 쓰레기 오염을 통해서도 미세플라스틱이 인체로 들어온다. 1972년 1월 미국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미국인 100명 중 86명의 몸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은 “인간이 이제 조금씩 플라스틱이 되고 있다(Humans are just a little plastic now)”고 표현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환경호르몬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조각이 아예 인간의 몸속을 떠돌고 있다. ‘인간의 플라스틱화’가 한층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이다. 미세플라스틱 인체 건강 위협 소비감량·대체·재활용 대책 시급 11월 부산 ‘정부 간 회의’ 성과내야 플라스틱 사용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매년 4억6000만 t을 사용하고 있는데 70년 전보다 230배 많은 양이다. ‘물질의 황제’로 등극한 플라스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2060년에 12억3000만 t을 사용할 거란 전망이다. 석유화학업체들은 석유 연료 수요 감소를 우려하면서도 경쟁적으로 플라스틱에 투자하고 있다. 석유 에너지 퇴출이 오히려 플라스틱 사용을 촉진하는 아이러니다. 심각한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협약이 진행되고 있다. 2022년 3월 유엔 환경총회에서 플라스틱 국제협약 제정을 결의한 이후 지난해까지 세 차례의 정부 간 회의(INC)를 개최했다. 오는 11월 마지막 5차 회의를 끝으로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지만 석유계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자는 구속력 있는 합의는 쉽지 않아 보인다. 산유국들과 석유화학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이 생산량 감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유해성을 입증할 과학적 증거와 석유 원료 대안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걸림돌이다. 5차 회의에서 협약 제정을 완료하고자 할 경우에는 감량에 대한 원칙적 선언과 국가별 자율 감축 계획을 밝히는 정도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높다. 재활용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또한 쉽지 않다.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현재 10% 남짓이고, 높아질 전망도 어둡다. 플라스틱 재질 및 첨가제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같은 재질의 플라스틱을 모아서 녹이는 물리적 방법엔 한계가 분명하다. 모으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물성 악화로 재활용 횟수의 제약도 있다. 재활용을 반복할수록 오염물질이 농축되는 안전성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플라스틱을 분해해 기름을 뽑은 다음 플라스틱 원료로 사용하는 화학적 재활용 방법은 어떨까. 물리적 방법보다는 좀 더 넓은 범위의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고, 오염물질이 배출되는 약점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힘들더라도 석유계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대한 분명한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 탄소배출 감축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기후변화 협약과 플라스틱 협약 모두 석유 사용 감축 및 종국적 퇴출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석유계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 소비 감량, 대체, 재활용의 순으로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일회용품 및 일회용 포장재 사용 금지, 세금 부과 등의 강력한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 재사용 용기의 사용을 촉진할 수 있는 국제 규범을 이번 협약을 통해 제시해야 한다. 어느 한 국가의 노력과 민간의 자발적 캠페인만으로는 플라스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대기와 해양 방출, 쓰레기 수출을 통해서 플라스틱 오염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 국제협약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오염 종식을 위한 강한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 오는 11월 마지막 회의는 부산에서 열린다.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플라스틱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도 오염 종식을 위한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

2024-04-25

[주정완의 시선] 청년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란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다. 같은 제목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2008년)에서 작품상 등 4관왕에 올랐다. 2024년 대한민국에선 이렇게 바꾸고 싶다. ‘청년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는 말이다. 지난 22일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의 발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날 시민대표단의 다수안으로 발표한 내용에선 청년 세대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서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됐거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에는 핵폭탄급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천하람 국회의원 당선인(개혁신당)이 “미래 세대 등골을 부러뜨리는 ‘세대 이기주의 개악’”이라고 비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22대 국회에서 흔치 않은 30대 당선인인 그는 “미래 세대에 더 큰 폭탄과 절망을 안겨야 하느냐. 이러다가 미래 세대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공론화위 다수안, 개혁 아닌 개악 17년 전 연금개혁 노무현도 배신 미래 세대의 등골 빼먹기 멈춰야 공론화위원회의 다수안이 왜 문제인가. 청년 세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독소 조항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현재 40%에서 50%로 인상하는 내용이다. 듣기 좋은 말로 ‘더 내고 더 받기’라고 했지만 겉포장에 속으면 안 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도대체 소득대체율 40%는 언제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원래 이 비율은 70%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12월 이 비율을 60%로 낮췄다. 당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역설적으로 연금개혁의 원동력이 됐다. 그래도 연금 재정의 구조적 적자는 심각했다. 이번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7월 국회를 통과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그 결과물이다. 여기엔 소득대체율을 단계적으로 40%까지 낮춘다는 내용을 담았다. 물론 노 전 대통령 혼자 다 했다고 할 순 없다. 그래도 노 전 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던 유시민 작가는 이런 회고(『한국 대통령 통치 구술 사료집 5: 노무현 대통령』)를 남겼다. 그는 “법안을 만들어 여당(열린우리당)에 주기 전에 먼저 야당(한나라당)하고 협상한 걸 대통령이 일일이 다 보고받았고, 그래서 백지 위임장을 받고 협상해 나갔다”고 말했다. 물밑 협상에서 법안 통과의 대가로 야당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선 “(노 대통령이)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했다. 뭐든지 다”라며 “(협상이) 막힐 때마다 전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했다”고 전했다. 이런 과정에서 성사된 게 2007년 2월 9일 당시 노 대통령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여야 영수회담이었다. 유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은) 영수회담이란 말 자체를 봉건적이라 그래서 싫어하셨는데 ‘그래도 여야 영수회담을 해줘야 됩니다. 그쪽에서 원하기 때문에’라고 말씀드렸다”고 회고했다. 이날 영수회담에선 공동 발표문까지 채택했다. 여기엔 “국민연금 재정의 건전성을 높이고 사각지대를 줄이는 방향의 국민연금 제도 개혁”이란 내용이 들어갔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해 4월 국회 본회의에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올라갔지만 야당 의원들의 주도로 부결됐다. 당시 임채정 국회의장은 부결을 우려하면서 법안 상정을 망설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직접 임 의장에게 전화해 “정부가 책임질 테니 표결에 부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법안 부결의 여파로 유 장관은 사퇴하고 한덕수 총리가 야당과의 협상에 나섰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 여야 합의에 이른 게 현재의 소득대체율 40%다. 인제 와서 재원 대책도 없이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는 건 미래 세대에 죄를 짓는 것일 뿐 아니라 이른바 ‘노무현 정신’도 배신하는 것이다. 미래가 암울할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나라도 국민연금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던 1980년대 얘기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참모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질색을 했다고 한다. “국민연금이라니, 나라 말아먹자는 얘기 아니오. 국민연금 하다가는 우리도 영국처럼 망해요.” 과도한 연금 적자로 ‘유럽의 병자’ 소리를 듣던 영국처럼 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2020년대 대한민국은 1980년대 영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연금 재정의 부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나라가 거덜 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진영을 떠나 연금 적자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주정완(joo.jungwan@jtbc.co.kr)

2024-04-25

[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소문난 효자, 페미니스트, 100세 넘겨 고려 최장수…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최루백의 삶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옛날 보통 사람의 삶을 복원해보고 싶어 한다. 고려·조선의 보통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조상이고, 현재 우리도 모두 보통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역사학자의 호승지심(好勝之心)을 부추기는 요소가 있다. 남아 있는 사료 거의 다가 소수 지배층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의 삶은 사료를 거꾸로 읽어야 복원할 수 있다. 어려운 만큼 보람 있는 일이지만, 사료의 한계는 절대로 쉬 넘어설 수가 없다. 특히 고려시대가 그렇다. 고려 앞의 삼국시대는 오히려 『삼국유사』 같은 데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남아 있고, 조선 시대는 유명하지 않은 인물의 일기가 여럿 남아 있지만, 고려는 그런 사료가 없다. 그런 가운데 최루백(崔婁伯)은 참 반가운 사람이다. 여러 사료에 조금씩 나오는데, 그 조각들을 찾아 모으면 고려시대 보통 사람의 삶을 얼마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료 부족 ‘보통의 삶’ 복원 한계 최루백 예외, 그를 통해 추정 가능 “이름 경애…함께 못 죽어 애통” 첫째 아내 죽자 애틋한 묘지명 자녀 유교식 이름, 장례는 절에서 큰딸 남편과 사별 뒤 친정 돌아와 아버지 해친 호랑이 죽여 복수 최루백의 이름은 우선 『고려사』 열전(列傳)에 나온다. 열전이란 개인의 전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고려시대 인물 약 1000명이 올라 있는데, 그 가운데 효자·효녀 17명을 따로 모은 효우편(孝友篇)에 들어있다. 그에 따르면 최루백은 수원의 향리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의 본관이 수원이며, 조상들은 아직 중앙의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대대로 수원에서 향리 직을 세습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열전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최루백이 열다섯 살 때 최상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다. 최루백은 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는데, 어머니가 만류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쫓아갔다. 호랑이가 배가 불러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네가 내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도끼로 내리쳐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담아서 개울가에 묻었다. 또 아버지의 뼈와 살을 골라내서 장사지낸 뒤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가져다 먹었다. 이 일로 최루백은 고려시대의 효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뒤 과거에 급제했는데, 향리 집안의 자제가 급제해서 관리가 되는 것은 고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고려사』 다른 곳에는 1153년(의종 7년) 11월에 기거사인(起居舍人) 최루백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과 1158년 9월 국자사업 최루백이 국자감시의 시험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거사인과 국자사업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만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이고, 외국에 사신 가는 것과 과거의 시험관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단히 특별한 경력은 아니었고, 최루백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하나의 유물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이라는 유물이 있다. 봉성현군이라는 외명부(外命婦, 관리의 부인에게 주는 관직)를 가지고 있던 염씨(廉氏) 부인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돌에 새겨 무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염씨 부인의 묘지명을 새긴 석판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인데, 이 묘지명을 지은 사람이 바로 염씨의 남편 최루백이었다. 최루백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기리며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이다”라고 해서 그 이름을 밝혀놓은 것이다. 부인과 딸의 이름을 남기다 고려 500년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이름은 거의 없다. 여성에게 이름이 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다. 하지만 염경애의 존재는 그 의문을 깨끗이 씻어준다. 여성도 이름이 있었지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마침 염경애의 친정어머니 심씨의 묘지명도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심씨의 이름은 지의(志義)이고, 정애(貞愛)라는 둘째 딸이 있었다. 또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귀강(貴姜)·순강(順姜) 두 딸이 있다고 되어 있다. 다른 묘지명들은 모두 딸의 이름을 감추고 첫째 딸, 둘째 딸 하는 식으로 기록한 데 비해서 최루백은 아내뿐 아니라 딸들 이름도 모두 알렸으니,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라고나 할까? 심지의·염경애·염정애·최귀강·최순강 다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시대 여성 이름 전부라고 하면 좀 놀라운 일일까? 최루백이 지은 염경애 묘지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황통 6년 병인년(1146년) 정월 28일에 최루백의 처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를 마련했다가 2월 3일에 화장하고 유골을 봉해서 서울 동쪽 청량사(淸凉寺)에 모셨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1148년)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사지냈으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여기서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불교국가답게 장례의 단계 단계마다 절이 등장한다. 또 빈소를 차렸다가 닷새 되는 날 화장하고 3년 만에 장사지냈는데, 요즘 많이 하는 화장 후 매장 풍습이었다. 장지는 친정아버지 곁으로, 친정어머니 심씨는 남편 곁에 묻혔으니, 부모와 딸이 사후에 한데 모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염경애는 스물다섯에 최루백과 결혼했다. 고려시대 남녀의 결혼 연령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이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또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고려시대의 평균 자녀 수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또한 귀중한 자료이다. 아들들 이름은 위부터 단인(端仁)·단의(端義)·단례(端禮)·단지(端智)라고 지어서 단을 돌림자로 하고 유교의 4덕(四德)인 인·의·예·지를 이름자로 썼다. 그러면서도 4남 단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고 했으므로 유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고려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또 큰딸 귀강은 남편이 죽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절대 출가외인(出嫁外人)일 수 없는 고려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최루백의 덤덤한 기록은 고려 사람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고려시대 여성 재혼도 거리낌 없는 일 묘지명은 고인에 대한 기록인 ‘묘지’와 고인을 칭송하는 운문인 ‘명(銘)’으로 이루어진다. 최루백은 묘지 뒤에 다음과 같은 명을 붙였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먼저 떠난 부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함께 죽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남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부인이 죽은 뒤 재혼을 했다. 이 사실은 최루백 본인의 묘지명이 남아 있는 바람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처음에 ▤▤▤와 결혼해서 4남 2녀를 두었다. 유▤▤와 다시 결혼해서 3남 2녀를 두었다”(▤는 읽을 수 없는 글자)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최루백의 재혼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재혼은,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혼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부다처제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려는 엄격한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상처 후의 재혼이 오히려 그 근거가 된다. ‘해주오씨 족도’에 최루백이 또 한 번 등장한다. 족도(族圖)란 본격적인 족보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 집안의 계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이 족도는 1401년(태종 1)에 만들어졌는데, 조선 전기 가계 기록답게 자기 집안뿐 아니라 처가의 조상까지 기록했고, 그 덕분에 4세 오찰(吳札)의 처증조로 최루백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뜻밖의 곳에서 그 이름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최루백의 묘지명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갑자(古甲子)로 전몽은 을(乙), 적분약은 축(丑)이니, 을축년 즉 1205년이 되는데, 첫 부인 염경애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59년 뒤이다. 염경애의 생년이 1100년이므로, 두 사람이 동갑이면 최루백의 향년이 105세이고 5년 연하라도 100세가 된다. 젊어서 호랑이 고기를 먹어서였을까. 아무튼 고려의 최장수 기록이다. 이렇게 고려 사람 최루백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2024-04-25

[이재승의 퍼스펙티브] 한국 실용외교의 카드는 제조 역량과 문화 파워

혼돈의 국제질서, 한국 외교의 길은 국제 정세의 거대한 체스 보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쟁 지역이나 주요 국가들 모두 국내 정치와 국제 관계에 있어 혼돈기에 접어들고 있다. 미국 대선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동북아 갈등도 1년 뒤를 내다보기 어렵다. 국제 질서와 규범의 파편화는 안보와 경제 두 차원에서 외교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에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더욱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혼돈의 시기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리셋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국제 질서를 논의할 핵심 그룹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그게 ‘주요 7개국(G7) 플러스’일 수도,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초청장 여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른다는 자조는 G7의 작동구조를 이해한다면 난센스다. 오히려 형식이 아니라 실력으로 그 리그에 당당히 들어가는 게 중요하고, 그게 그리 불가능한 전망만은 아니다. 대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더욱 적극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체제는 자산…동맹 플러스 차원에서 실용외교를 가치와 실용은 대척점에 있지 않아, 맹목과 단순화 경계해야 조용하면서 강한 외교력 발휘하는 유럽 국가들 눈여겨봐야 정부·의회·학계·기업 간 소통 강화하는 외교 자문기구 긴요해 재임 기간 내 성과에 강박감 금물 한편에서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맹외교의 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명분과 가치보다 실리를 우선시하자는 실용외교의 논리는 현실정치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용외교는 누구와 할 것인지에 대한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방법론의 문제다. 외교는 점과 선과 면으로 구성된다. 점점이 놓여 있는 핵심 인사들을 관리하고, 기업과 기관들과 연계를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국가 간의 관계가 형성된다. 점을 찍고, 모으고, 선을 잇는 작업을 통해 대외적으로 비치는 면의 외교가 완성된다. 특히 안보와 동맹 관리에 있어서는 큰 방향을 보여주는 그림을 갖출 필요가 있다. 격을 따지고, 의전을 갖추고, 거대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면’에 집착하는 외교는 자칫 공허해지기 쉽다. 촘촘하게 갖춰진 점과 선이 없이 만들어진 외형은 잠시 열광하다가 사라지는 홀로그램과 같다.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또 다른 면을 급조하는 것이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임 기간 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은 단임제 정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실용외교가 가장 피해야 할 걸림돌이기도 하다. 허식을 벗는 게 실용외교다. 그 인식을 지도자와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이해관계를 다루는 경제외교는 큰 차원에서의 담론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차원에서 얽혀 있는 수많은 개별 사례들을 풀어내야 한다. 여기서는 얼마나 많은 점과 선을 잇는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점과 선이 있으면 빠르게 면을 만들고 모양새를 복원할 수 있다. 실용외교의 근간을 이루는 이들 네트워크는 종종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신뢰와 협상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비(非)우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이러한 점과 선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의외로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많다. 빈틈없는 계산과 정책 일관성 중요 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이러한 실용외교를 잘 추진한 사례로 꼽힌다. 경제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력을 세계 곳곳에 깔아두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가진 것보다 하나씩 적게 내보인다. 그 신중함이 협상력을 높인다. 네덜란드는 고도의 개방성과 실용성을 과학 혁신과 접목하는 한편, 국제 규범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세계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축을 만들어왔다. 인접한 옛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동서 진영의 가교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낸 핀란드도 생존 전략에 있어 실용성을 깔고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구 500만의 국가인 핀란드는 국제 평화 중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말과 감정을 아끼면서도, 빈틈없는 계산과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 데 있다.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사례들이다. 문화 소프트파워 활용 공간 넓어져 한국은 실용적인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세 개의 카드가 있다. 첫 번째 카드는 제조업 역량이다. 자동차에서 반도체, 소프트웨어에서 방위산업에 이르는 산업의 전 분야를 집약적으로 보유한 국가는 전 세계에 얼마 없다. 서울을 중심으로 세 시간 비행거리 안에서 전 세계 반도체와 휴대전화의 압도적 물량이 생산되고,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생태계가 집중돼 있다. 배터리와 반도체는 해외 경제안보의 거점기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을 파트너로 하게 되면 집약된 제조업과 지리적 접근성의 장점을 누릴 수 있다. 그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두 번째의 카드는 문화적 소프트파워의 증가다. 문화적 친밀감은 한국이 보유한 점과 선을 연결하는 데 있어 진입장벽을 낮추고 호감도를 높인다. 콧대 높았던 유럽에서부터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제3 세계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소프트파워를 통해 활용할 공간이 늘어났다. 문화 역량이 경제적·정치적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 번째 카드는 지난 수년간 엑스포 유치를 위해 발로 뛰어다닌 경험이다. 비록 유치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까지 눈으로 보고 수많은 점을 찍고 다녔다.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네트워크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만큼 밑밥을 던져놓았는데 낚싯배를 띄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효가 남아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관계들을 선별해 이어 나가야 한다. 비싼 수업료를 낸 것은 반드시 그 가치가 있다. 동북아 연계할 상상력 발휘해야 하지만 이러한 카드들을 실용외교에 성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과제가 수반된다. 첫 번째 과제는 안전판이 되어줄 동맹과 우방의 확보다. 이미 세계는 다극화된 파트너십으로 묶여가고 있다. 한·미·일 공조체제는 현시점에서 가장 확실한 외교적 자산이다. 감정의 골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한국 외교의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다자 무대에서 활동 공간을 넓혀주는 치트키다. 외교 일선에서 뛰어본 사람들은 한·일 적대관계가 얼마나 큰 비용을 치르게 했는지 뼈저리게 안다. 협상력을 가지는 실용외교는 ‘동맹 플러스’로 확대됐을 때 효율적으로 기능한다. 동맹만 보는 것도, 동맹을 경시하는 것도 실용외교의 실패로 귀결된다. 두 번째 과제는 동북아를 연계할 상상력의 발휘다. 일본과 중국은 우방을 따지기 이전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거대 경제권이다. 북한은 숙명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한반도의 절반이다. 핵 억지에는 여전히 동맹이 필요하고, 경제 안보에는 중국이 함께 해야 한다. 이런 한국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자신밖에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은 엄중하지만,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협상력을 역으로 중국과의 경제관계에 투사해야 한다. 산업 차원에서 일본과의 연계 강화는 미국·중국과의 관계 설정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프랑스는 2차대전 이후에 석탄철강공동체라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유럽통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합리적인 상상력이 발휘되면 실용외교는 힘을 받는다. 민간 외교 역량 강화도 지원하길 세 번째 과제는 극단적 감정과 단순화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파트너를 수시로 바꾸는 무원칙의 실용은 존중받지 못한다. 외교가 정쟁화되고 감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역으로 경쟁국들이 가장 반기는 상황이다. 한국이라는 중요하면서도 견제해야 하는 나라가 쉽게 분열되고, 쉽게 잊어버리고, 스스로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내심 반길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냉소와 가십의 대상이 되는 외교가 상대에게 존중을 받는 경우는 없다. 때론 포커페이스도 필요하다. 실용외교의 본질은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굳어진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실용외교의 국내적 기반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력한 국내 비토 그룹의 존재는 치밀한 전략이 받쳐준다면 협상력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다. 새로운 국회가 출범하는 시점에서 정부·의회·학계·기업 간의 소통을 강화하는 초당적 외교 자문기구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외교와 국방은 최고지도자 고유의 권한 영역이지만, 소통의 확대를 통해 정쟁의 대상이 아닌 지속적인 외교전략을 논의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가 있다. 아울러 민간 부문이 보다 주도적으로 움직이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 간 관계로만 풀기에는 국제 관계의 현실은 너무도 복잡하고 엄중하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2024-04-25

베니스부터 광주까지, 비엔날레 이제 달라질 때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외국 관람객들이 월전 장우성의 1943년 수묵채색화 ‘화실’과 이쾌대의 1940년대 유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난 20일 개막한 세계 최대 미술축제 베니스비엔날레(비엔날레 디 베네치아) 본 전시에서였다.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은 다양한 비서구 화가들의 20세기 초반 초상화 100여 점을 한데 모은 ‘초상화’ 섹션에 있었다. 그 많은 그림 중에서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추는 이들이 유독 많았다. 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그림 속의 한복을 가리키며 “코레아…”라고 대화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또한 K컬처의 세계적 유행의 여파가 아닌가 싶었다. 베니스비엔날레의 월전·이쾌대 ‘제3세계’ 벗어난 한국 상기시켜 식상한 서구의 ‘비서구’ 담론에 ‘변종’ 한국이 대안 제시 가능 그런데 이것을 바라보는 한국인 일행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와, 장우성과 이쾌대 그림이 인기 많네”하고 반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데 ‘제3세계’ 작품들의 일부분으로서 섞여 있는 게 뭔가 기분 좋지 않네”라는 이들도 있었다. ‘외국인’을 주제로 한 베니스비엔날레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의 주제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문자 그대로 타국인 혹은 이주민, 난민 등을 가리키기도 하고, 상징적인 의미의 이방인, 즉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성 소수자 및 서구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토착민 등을 아우르기도 한다. 장우성과 이쾌대 그림이 있는 ‘초상화’ 섹션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예술가들이 서구 모더니즘을 접한 상황에서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한 초상화를 재조명한다”는 취지다. ‘글로벌 사우스’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의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을 아우르는 말이다. UN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이기에 여기에서 공식적으로 제외된다.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도 이를 의식했는지 “엄밀히 말하면 더는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지 않는 싱가포르와 한국의 작가들도 이 섹션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장우성과 이쾌대 등의) 작가들이 작품을 창작할 당시에는 이른바 제3세계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공식 설명문에서 언급했다. 1940년대에 우리는 최빈국 식민지였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이 이 섹션에 걸려있는 것을 보는 기분은 묘하다. 우리가 과거 제3세계였다는 자각,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이며 제3세계로 묶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다른 제3세계 나라들과 ‘구별 짓기’를 하는 태도가 올바른 것인가 하는 자문, 서구인의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한 기쁨과 ‘우리는 기껏 명예 서양이 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자괴감의 교차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복잡한 마음은 한국인이 베니스비엔날레를 대하는 마음, 나아가 서구 진보 진영이 지배하는 국제 문화예술의 장을 대하는 마음일 것이다. 서구 예술계, 한국 다루기 어려워해 사실 한국인만큼이나 서구인, 특히 서구 진보진영이 한국을 대하는 마음도 복잡하다. 한국은 한때 제3세계였으나 더 이상 아니며, 서구화와 근대화로 인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고, 그것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혼종’ K컬처를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베니스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미술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구 진보진영의 담론인 ‘후기 식민주의, 토착문화 재조명, 서구인으로서의 원죄의식이 담긴 반(反)서구주의, 반(反) 자본주의 모더니티’에 뭔가 잘 들어맞지 않는 ‘변종’이다. 서구 문화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전파에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렇다고 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 진보진영 학자와 예술가들은 한국을 다루기 껄끄러워하는 듯하다. 이는 이런 담론의 중심지인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기자가 유학하던 시절 체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에 의해 쉽게 규정되지 않는 변종인 동시에 경제적·문화적 힘을 갖춘 한국이야말로 늘 비슷한 담론을 되풀이하고 있는 서구 문화예술의 장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역시 ‘비서구와 소수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서구인 관점에서 본 비서구와 소수자’라는 담론의 반복이었다. 서구 남성 위주의 유명 작가들 대신 세계 방방곡곡의 미처 몰랐던 좋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보여준 것은 분명 성과였다. 그러나 담론이 식상해서 울림이 크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의 대표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 역시 담론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는 올해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의 외국인 큐레이터가 된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 뮤지엄 관장이 총감독을 맡았었다. 제1부는 현대의 모든 압박(정치권력부터 소수자에 대한 편견까지)에 대한 저항과 연대를, 제2부는 토착 문화에 기반을 둔 탈현대성을, 제3부는 후기 식민주의를 다뤘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도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당시 이숙경 감독은 작가 소개에 국적 대신 그들이 태어난 지역과 지금 활동하는 지역을 넣어 그들의 초국가적이며 복합적인 정체성을 강조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매력적인 작가도 많이 발굴했다. 이러한 장점 또한 이번 베니스비엔날레가 이어받았다. 단점이나 장점이나 닮은꼴인 것이다. 새 담론 제시 못하는 비엔날레들 한국에서는 지자체마다 우후죽순 생기면서 관광용 지역 축제 정도로 오해되고 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비엔날레의 정신은 미술관 전시로는 힘든 대규모 국제전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담론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미술계에서는 이제 세계 비엔날레들이 담론을 이끌지 못하고 급변하는 현실에 뒤처지고 있다는 탄식과 비엔날레 무용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박양우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는 “최근 들어 베니스, 광주, 그 밖에 주요 세계 미술제가 너무 크고 막연하고 비슷한 담론을 되풀이해온 게 사실”이라며 “좀 더 특화된 주제를 잡는 것을 비롯해 궁극적으로 달라질 길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변종’ 한국은 문화예술계에서 수십년째 되풀이되어 온 서구 진보 주도 담론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역량이 있다. 그 발판이 한국의 비엔날레이길 희망한다.

2024-04-25

[글로벌 아이] 워싱턴에서 조금씩 커지는 한국 핵무장론

‘어쩌면 핵무기의 한반도 재배치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모른다.’ 리처드 롤리스 전 국방부 부차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담당 부차관보 등 미국 내 손꼽히는 외교안보 전략통을 최근 인터뷰하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다. 이들은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며 미 본토 공격 능력을 갖췄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핵우산)에만 의존하는 데 대한 한국 내 우려와 의문을 이해한다는 전제도 같다. 볼턴 전 보좌관은 “확장억제 능력이 가상이 아니라 바로 한국에 있다는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고, 롤리스 전 부차관은 ‘나토식 핵 공유’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집권 시 유력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콜비 전 부차관보의 경고는 더욱 극적이다. 미국이 대(對)중국 군사적 우위를 잃은 상황에서 “뒤처진 핵 균형을 위해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4월 한·미 핵협의그룹(NCG) 신설을 골자로 한 ‘워싱턴선언’의 한계를 지적하며 미국이 자국의 도시를 북한의 핵공격에 희생하면서까지 한국 안보를 지켜줄 거라고 약속할 수는 없다고 한 대목은 오히려 솔직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사실 그는 5년 전만 해도 “한국의 핵무장에 반대한다”(2019년 VOA·미국의소리 인터뷰)고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간 북한의 거듭된 폭주에 지금은 “미국의 재래식 전력 지원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직접 한반도를 방어해야 한다”며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한다. 미국 정부의 공식 기조는 여전히 ‘한반도 비핵화’에 맞춰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을 재확인했다. 한국 핵무장시 동아시아 핵확산의 시발점이 될 거란 우려도 미 조야(朝野)에 여전하다. 다만 금기시해 오던 한국 핵무장론이 ‘중국 견제’라는 대전제 속에 공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분명 심상치 않아 보인다. 비핵화의 길이 난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한·미 군사동맹을 고도화하고 자주국방 역량 또한 획기적으로 강화해 확장억제 역량에 대한 의문을 불식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남북 물밑대화에도 계속 힘써 우발적 충돌을 미연에 막아야 한다. 북핵 문제는 손이 묶인 상황에서 손을 써야 하는 난제 중 난제가 됐다. 김형구(kim.hyounggu@joongang.co.kr)

2024-04-25

[백우진의 돈의 세계] 『브리태니커』 리덕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 오빠가 『브리태니커』를 결혼 선물로 줬어요. 오빠가 보기에는 그게 없으면 제대로 된 가정이 아니었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여동생 조안 파인만이 이렇게 회고했다고 책 『리처드 파인만』은 전한다. 천체물리학자가 되는 조안은 1948년에 결혼했다. 『브리태니커』는 앞서 20세기 들어 미국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영어권 최초로 1768년부터 이 백과사전을 발행해온 스코틀랜드 회사의 소유권이 1901년 미국으로 넘어가면서였다. 『브리태니커』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68년 한국지사를 설립한 한창기는 이를 백과사전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고, 그 수익으로 월간 ‘뿌리 깊은 나무’를 발행하면서 우리 문화를 보듬었다. 한창기가 도입·실행한 현대적인 판매 시스템 속에서 나중에 웅진그룹 회장이 되는 윤석금이 54개국 최고의 『브리태니커』 세일즈맨에 올랐다. 콘텐트의 블랙홀 인터넷에는 이 백과사전도 버텨내지 못했다. 1990년 12만 질이 팔리던 전성기는 이내 꺾였다. 2012년 종이 책 발행이 중단됐다. 그랬던 『브리태니커』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르면 6월 뉴욕증시 기업공개(IPO)를 추진한다고 보도됐다. 유료로 제공하는 온라인 서비스와 학생 대상 교육 서비스 등 안정적인 수익원을 마련했으며 기업가치는 10억 달러로 평가된다고 전해졌다. 부활의 저력은 무엇일까. 첫째가 ‘품질이 뛰어난’ 지식의 방대한 저량(貯量)이다. 파인만은 이 백과사전의 설명은 “설령 내용이 압축돼 있더라도 전부 자세히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둘째는 이를 시의적절하게 홈페이지를 통해 유량(流量)으로 내보내는 큐레이션이 아닐까 싶다. 연간 온라인 페이지뷰는 70억건에 이른다고 한다. 콘텐트 서비스 사업자라면 참고할 대목이다. 백우진 경제칼럼니스트·글쟁이㈜ 대표

2024-04-25

[최정혁의 마켓 나우] 주식 투자자가 ‘스토리’에 속지 않으려면

사람들은 세상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세상의 변화를 합리화할 수 있는 ‘스토리’를 본능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도 같은 목적을 위해 협력하도록 이끄는 스토리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 전달력과 영향력에서 스토리는 숫자를 압도한다. 특히 경제에서 스토리의 힘은 강력하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근심거리는 양호한 경제지표에 비해 낮은 지지율이다. 그는 스토리에서 지고 있다. 사람들이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은 쉽게 체감하기 어렵지만, 주위 사람들과 언론을 통해 접하는 일상의 ‘고물가 스토리’는 마음에 크게 와 닿는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하버드대 토머스 그레이버 교수의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스토리는 통계수치보다 사람들의 기억에 두 배 이상 오래 남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토리는 주식시장에서 집단행동을 끌어내기도 한다. 투자자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켜 스토리와 관련한 기업의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의 인공지능(AI) 열풍이 그런 경우다. 챗GPT의 탄생과 맞물려 본격화된 ‘AI 스토리’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거대한 자금을 흡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적정한 가치평가에 있다. 아직은 숫자로 측정되는 펀더멘털이 불확실한 탓에 스토리가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에 투자자들이 몰려 거품이 낄 수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비관적인 스토리가 강해지면 투자금이 유출되고 주가는 적정 가치를 밑돌게 된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이 좌우하는 주가 움직임에 대처할 방법은 무엇일까. 미주리대 쿤타라 푹투안통 교수의 2021년 연구가 단서를 제공한다. 미국 양대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이 130년 이상 축적한 전체 기사 데이터와 S&P500 지수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패닉’ 관련 스토리와 ‘주식시장 버블’ 관련 스토리는 향후 주가 수익률에 대해 상당한 예측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패닉 스토리’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높은 주가 수익률이 뒤따랐고, 주식시장 ‘버블 스토리’의 경우는 반대였다. 스토리가 무르익어 가면서 주가는 점점 적정 가치를 벗어나고 결국엔 주가 움직임의 전환이 시작된다. 또한 독자의 믿음에 맞춘 콘텐트 제공이라는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는 언론의 특성상, 기사는 이미 주가에 반영된 스토리일 가능성이 크다. 언론이 다루는 기사에 주목하되 무작정 기사를 따르지 말고 기사에 대한 주가의 반응도 함께 관찰해야 하는 이유다. 최정혁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자산관리학과 교수

2024-04-25

[권석천의 컷 cut] 변화의 시작은 용기가 아니라 상상력이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갈림길에 서곤 한다. 살던 대로 살 것인가, 다른 삶을 모색해볼 것인가. 그 쉽지 않은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선택을 망설이면 고민의 버퍼링만 계속될 뿐이다.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4’는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용의 전사’ 자리에 오른 팬더 포. 그는 어디를 가나 박수 받는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그런 포에게 사부 시푸는 변화를 요구한다. “‘용의 전사’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영적 지도자가 되라”는 것이다. 고생 고생해서 정상에 올랐는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영적 지도자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인생에서 가장 큰 적은…계단?” 계단은 ‘쿵푸팬더’ 시리즈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포가 ‘용의 전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숨을 헐떡이며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오르고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계단이 눈앞에 있다. 포는 과연 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을까. 안 해본 일, 모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막막하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이유로 맨날 해왔던 일만 반복한다면 얼마나 무료하고 지겨울 것인가.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해볼 때 나조차 몰랐던, 나의 다른 면모가 드러날지 모른다. 거창한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해도 조금 달라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작은 발걸음도 발자국을 남긴다”는 영화 대사처럼. 아, 새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영화는 말한다. “용감해질 필요는 없어. 그냥 용감하게 행동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상상력이다. 새로운 미래에 가슴이 마구 설레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자, ‘다음 계단’에 대한 상상력으로 자신을 낯선 환경에 내맡겨 보는 것이다. 던져보는 것이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2024-04-25

[이윤정의 판&펀] 뉴진스 사태, 팬들은 기다려줄까

‘아일릿은 뉴진스의 카피다.’ 며칠 새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발표문의 이 문구는 법적으로는 별 효력이 없는 말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아일릿이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 사진, 영상, 행사 출연 등 연예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희진 풍’ 혹은 ‘민희진 류’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자신의 창작 ‘콘셉트’를 베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작권법에서 보호받는 대상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다. 구체적인 결과물이 아니고 전반적인 ‘이미지’나 ‘스타일’로는 표절의 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팬덤은 논리적이지 않고 신비 팬심이 창작자 의도보다 중요 뉴진스 활동 중단될까 우려 커 팬들은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법에 맞춰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산업이 가장 독특해지는 지점은 인간의 ‘매력’이라는 상품에 예측할 수 없는 ‘팬덤’이라는 신비한 마음의 영역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물적인 상품들과는 달리 대중문화 히트의 규칙이나 비밀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느 곳에서 스타의 매력을 찾아낼지 모른다. 팬덤은 논리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있지도 않다. 예측과 기대는 종종 어긋난다. 클리셰로 범벅된 드라마, 스캔들로 얼룩진 스타, 가창력 논란을 달고 다니는 가수에게도 매료되는 이유다. 누구의 아류 혹은 카피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매력을 느껴버린 팬덤은 말릴 수가 없다. 아일릿은 논란 속에서도 데뷔곡 ‘Magnetic’으로 빌보드 핫 100에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K팝과 한껏 사랑에 빠져버린 세계적 팬들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뉴진스로 K팝의 물꼬를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 민희진 대표는 하이브 방시혁 대표의 창작 윤리나 리더십을 제작자 입장에서 탓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이 뉴진스와 아일릿의 관계를 K팝의 새 트렌드 혹은 장르의 전형적인 탄생과정에서 등장하는 ‘파이오니어’와 ‘팔로워’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는 결국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팬들의 수용 여부가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팔로워로서도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자기복제만 거듭된다면 팬덤은 또 한순간 싸늘하게 식을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겨우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두 그룹을 놓고 훗날의 결과를 예측하긴 이르다. 제작자로서 자신의 독창성을 주장하려던 민 대표의 발언은 팬들의 마음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일릿이 뉴진스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말을 계기로, 모기업과 산하 레이블 제작자가 벌이는 싸움을 경영권 탈취 논란 등 업계의 분쟁으로 지켜보려던 팬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뉴진스만의 매력을 팬심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들의 스타일을 낱낱이 살피며 ‘카피’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스타의 매력을 제작자 스스로 깎을 여지를 줘버린 것이다. 또 “뉴진스의 멤버들과도 논의를 거쳤다”는 발언에 팬들로서는 피프티피프티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싸움이 큰 논란 뒤에 결국 대중들이 원하는 정의를 되찾은 방향으로 갔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뉴진스에 앞서 엄청난 새 역사를 썼던 여성 그룹의 놀라운 성취와 미래 가능성은 한 순간 정지되어 버렸다. 멤버들과 가족들이 싸움에 끼어든 순간 그룹은 활동을 중단하고 평생 가수들의 꿈이라고 할만한 무대와 기회들을 박차버렸다. 이 그룹이 앞으로 다른 인원으로 채워 활동하겠다고 하지만 딱 한 곡 히트시키고 사라졌던 그들이 낯선 얼굴로 등장할 때 팬들의 마음이 움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뉴진스 팬들이 하이브의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시위를 벌인 것은 혹시라도 민 대표 측과 가족들이 함께 긴 법적 분쟁을 벌이게 될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 경우 뉴진스의 오랜 활동 중단은 불가피하다. 팬들에게는 가장 슬픈 결과다. 이 산업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란 없다. 아티스트도 프로듀서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스타와 실력자들이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한 발만 삐끗해도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한때 반짝했다 사라지는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지금은 새로운 ‘콘셉트’보다, 대세를 거스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보다 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의 꾸준한 활동과 성장이다. 이렇게 전 세계의 팬들을 들썩이게 하는 큰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에 5월부터 뉴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원래 계획대로 씩씩하게 활동할 수 있을까. 싸움은 언젠가 어떻게든 끝나겠지만, 팬들의 마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올까.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팬들은 가시방석이다. 비즈니스는 모르겠고, 어서 나에게 예전처럼 노래를 들려줘. 팬들의 마음은 이렇지 않을까.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4-04-25

[김원배의 뉴스터치] 방시혁 대 민희진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3월 관훈포럼에서 성장률이 둔화한다며 ‘K팝 위기론’을 언급했다. 그는 “BTS가 계속 나오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멀티 레이블(Label)’ 시스템을 소개했다. 자회사인 여러 레이블이 독자 경영을 하되, 성과를 공유하고 건강한 경쟁을 통해 전체 수준을 높인다는 개념이다. 하이브 산하 레이블인 어도어는 2022년 뉴진스를 데뷔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방시혁이 그날 강조한 것은 창의적인 것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는 건강한 경영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사태는 책임 소재를 떠나 한계를 보여준다. 하이브는 “경영권 탈취 시도(어도어 독립)가 있었다”며 사임 요구와 함께 감사를 시작하더니 25일 민희진 어도어 대표를 배임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민희진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경영권 찬탈을 의도한 적이 없다. 실적 잘 내는 계열사 대표를 하이브가 찍어 누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이브의 다른 레이블이 선보인 걸그룹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고 이 때문에 뉴진스가 피해를 봐서 내부 고발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이브는 어도어 지분 80%를 갖고 있다. 이사는 주총에서 언제든 해임할 수 있다. 하지만 임기가 남은 경우엔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 있다. 이대로면 민희진 해임과 소송이 이어질 것이다. 이날 “민희진이 경영 과정에 무속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하이브발 보도까지 나왔다. 결코 건강한 경영은 아니다. 뉴진스는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까. 큰 성공이 분란과 자멸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K팝 산업의 위기다. 김원배(onebye@joongang.co.kr)

2024-04-25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지지대 넘어서 축구장으로

경기도 수원에서 안양으로 향하는 1번 국도 왼쪽에 비각이 하나 보인다. 비각이 있는 고개 이름은 지지대다. 조선 중기까지 이름은 사근현이었는데, 조선 정조를 거치면서 지지현(지지대)으로 바뀌었다. 사연이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고 환궁하던 정조는 고갯마루에 멈춰 현륭원을 바라봤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출발을 지체했다. 시도 지었는데, 중간에 ‘더디고 더딘 길에서 고개를 드니(矯首遲遲路)’라는 대목이 있다. ‘더딜 지(遲)’를 겹쳐 쓴 ‘지지’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썼던 말이기도 하다. 짠하다. 역사 공부는 여기까지. 축구 팬, 엄밀히는 나이 좀 있는 K리그 팬이라면, 정조나 공자 사연은 몰라도, 지지대라는 지명은 잘 안다. 안양 LG(FC서울 전신)가 2003년 말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기 전 수원삼성과 벌였던 라이벌전 이름이 ‘지지대 더비’였다. 두 팀의 연고 도시를 잇는 고개에서 따온 이 멋진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당시엔 이 이름이 아니라 그냥 ‘라이벌전’이었다. 재밌는 건 두 팀 서포터스는 상대를 라이벌로도 인정하지 않았고 미워했다는 점이다. 지나간 추억이 된 2005년 무렵부터 이 이름으로 불렸다. 아쉬움과 치열함이 오버랩되는 ‘지지대 더비’가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계기는 수원삼성의 추락이다. ‘프로축구 수원삼성 2부리그 강등’. 지난해 12월 2일 이 소식을 접하고 눈을 의심했다. K리그1(1부) 최하위(12위) 수원삼성은 그날 시즌 최종전에서 11위 강원FC와 0-0으로 비겼다. 이겨야 승강 플레이오프에라도 비벼볼 수 있던 처지였다. 수원삼성은 K리그 팀 중 가장 많은 24개의 우승 트로피를 보유한 ‘최강’ ‘명가’다. 강등 확정 후 자기 팀을 향해 ‘나가 죽어라’ 노래를 부르던 수원삼성 서포터스, 붉어진 눈시울의 염기훈 감독 표정이 선하다. 1부를 떠나는 발걸음이야 얼마나 떨어지지 않았을까. 지난 21일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수원삼성과 안양FC의 K리그2 경기가 열렸다. 21년 만에 돌아온 ‘지지대 더비’는 기대가 컸다. 리그 1위(수원삼성)와 2위(안양) 간 대결이라 관심도 높았다. 원조 ‘지지대 더비’와 달리, 두 팀은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지지대 더비’라는 그 자체가 서포터스의 아드레날린 수치를 높였다. 경기 전부터, 내내, 후에도 열기가 뜨거웠다. 수원삼성이 3-1로 이겼다. 이날 관중은 1만2323명으로, 2003년 안양 창단 이래 최다였다. 최근 K2리그 관중이 급증하면서 ‘수원삼성 강등 효과’라는 말이 돈다. 올해 K2리그 평균 관중 수는 4682명으로 지난해(2508명)의 약 2배다. 수원삼성 경기 평균 관중 수는 1만376명이다. 수원에서 열릴 두 번째 ‘지지대 더비’는 오는 8월 12일이다. 여름밤이 기다려진다. 장혜수(hschang@joongang.co.kr)

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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