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10조? 30조 써라" 힘 세진 을지로위···"갑지로위 같다"



진성준(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장은 지난 10일 새로 선출됐다. 그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륜차 배송 및 대리운전 표준계약서 도입을 위한 협약식’에서 "첫 일정을 뜻깊은 협약식으로 시작하게 됐다. 저는 그저 가만히 있다가 숟가락 얹는 셈이 됐다"고 했다. 왼쪽은 1기 위원장이던 우원식 의원. [뉴스1]






지난 14일 더불어민주당 ‘이륜차 배송 및 대리운전 표준계약서 도입을 위한 협약식’ 행사장.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한 자리에 둘러 앉았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의원 7명(진성준·박홍근·우원식·남인순·양경숙·이동주)과 황덕순 일자리수석 등 청와대 참모 3명(인태연 자영업비서관, 도재형 고용노동비서관), 손명수 국토교통부 제2차관, 강검윤 고용노동부 고용차별개선과장, 송상민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감시국장 등 정부 고위관료들이었다.

이들 앞에서 김범준 우아한형제들 대표를 비롯해, 강신봉 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 대표·이동규 카카오모빌리티 부사장 등 주요 플랫폼 기업 CEO 10명은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강규혁 위원장 등 민주노총 간부 4명과 표준계약서 도입에 애쓰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입법자와 집행자, 시장감시자 앞에서 갑과 을이 손을 잡은 셈이다.

김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플랫폼 기업과 종사자의 상생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 업계와 노동계가 어렵게 함께 만든 표준계약서가 현장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제대로 관리하고 점검하겠다”고 했다. 황덕순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표준계약서와 같은 사회안전망 보호에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고 했다.

덩치·힘 세진 여당 내 조직
협약식을 주관한 건 을지로위원회(위원장 진성준)였다. 입법·시행령 개정과 달리 법적 강제가 없는 협약식에 관련 기업인·노동계 인사가 모조리 나온 걸 보고 한 IT 업계 관계자는 “174석 거대 여당의 힘이 을지로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했다. 지난해 2월 을지로위는 당·정·청 협의체로 탈바꿈했다. 민주당의 우호적인 이익집단의 민원을 대변하는 의원 모임에 불과했던 야당 시절 을지로위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14일 협약식에 참석한 플랫폼 회사 경영진들은 정부 여당을 향해 "열심히 협력하고 돕겠다", "노력해왔다"고 했다. 왼쪽부터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 김범준 대표, '요기요', '배달통' 서비스 운영업체 딜리버리히어로코리아 강신봉 대표, 배달대행 서비스 업체 '바로고'의 조병익 COO. 오종택 기자






을지로위는 2013년 5월 남양유업 물량 밀어내기 갑질 사태가 불거졌을 때 ‘을지키기 경제민주화 추진위원회’란 이름으로 생겼다. 주로 대기업을 상대로 노동·불공정거래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들을 대변해 사회적 공론화 및 중재를 주도했다. 지난 2016년 자체 발간한 백서에는 “1000일간 960회가 넘는 현장방문과 기자회견 등이 진행됐고 62건을 해결했다”고 적혀있다.

을지로위에 참여하는 의원들 대다수는 범친문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지난 총선 승리로 이들의 수가 크게 늘면서 19대 국회 때 46명이던 을지로위원의 수는 21대 국회 들어 70명으로 급증했다. 민주당 의원(174명) 10명 중 4명꼴로 가입한 셈이다. 최근 진성준(재선) 의원이 위원장으로 선출됐지만 1기 위원장이었던 4선의 우원식 의원과 3기 위원장이었던 박홍근(3선) 의원 등이 여전히 운영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전해철·정청래·홍익표 등 3선 9명, 노웅래·김영주 등 4선 3명도 을지로위원이다.

우회 통로에서 목소리 커져
“을지로위가 점점 더 세를 불려 ‘갑지로위’가 될 수 있다”(민주당 전 의원) “개별 사안에 집중했던 과거와 달리 거대 담론을 다룬다”(민주당 보좌관) 을지로위의 비대화·권력화를 바라보는 당내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청와대 정책을 진두지휘하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올해 들어 열린 ‘민생현안회의’ 8번 중 5번 참석했다. 민생현안회의는 을지로위가 주관하는 당·정·청 회의다. 한 초선 의원은 “참석자의 면면이 을지로위의 위상을 보여준다”며 “때론 당 정책기구인 정책위원회보다 입김이 세다는 말도 들린다”고 했다.

지난 7월 내년도 지역 상품권 발행 규모를 논의했던 8차 민생현안회의는 을지로위원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높았던 회의였다. 참석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정부 측이 회의에서 10조원 내외 발행 계획을 밝히자 일부 을지로위원들은 “30조원까지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현장에 있던 한 당직자는 “10조원이든, 30조원이든 엄청난 규모의 예산이다. 예산을 짜는 예결위나 소관상임위인 기획재정위 등에서 논의하기도 전에 을지로위가 압력부터 넣는 게 옳은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김상조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과 당정청 을지로 회의의 주요 참석자다. 사진은 지난 5월 15일 제7차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 온 김 실장. 2020.5.15/뉴스1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 1호 공약으로 ‘범정부 을지로위원회’를 내걸었다가 취임 후 옥상옥 조직 탄생, 위원회 과잉 등 부작용 등 우려가 제기되자 을지로위를 당정청 협의회로 전환하는 수준에서 타협했다. 하지만 2013년 출범 이후 7년간 당 내외 권력화를 겪은 을지로위 주변에서는 이미 “야당 시절 을의 눈물 현장을 찾아가던 초창기 순수성을 잃었다”, “집권 이후 동원식, 사진찍기 행사를 만드는 일이 지나치게 늘었다”(을지로위 참여 보좌진)는 말이 나온다.

내실 잃고 사공만 늘렸나
을지로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의원·실무진 10명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공통으로 위원회의 정치 도구화를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을지로위 임원을 맡은 의원실에서 기자회견 전날 연락이 와서 와달라고 하더라. 사전 협의도 없고 내용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또 다른 의원은 “을지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탈퇴하기엔 핵심 의원들의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을 입장에 선 당사자들도 혼란스러워한다. 14일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민주노총 간부들에게선 “다음 행사장이 어디냐. 회의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문가들은 정부·여당이 플랫폼 노동과 경제 관련 논의의 장을 과잉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경사노위(경제사회노동위원회), 일자리위원회,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 을지로위와도 주제가 중첩되는 조직이 여럿”이라며 “많은 기구가 만들어지고 논의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된 제도 보완과 정비는 오히려 더뎌지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당대표실 앞에 '상생 꽃 달기' 보드판을 만들어 을지로위 관련 성과가 날 때마다 기념 촬영을 한다. 사진은 지난 5일 이낙연 민주당 대표(왼쪽 두번째), 이동주 의원이 임일순 홈플러스 대표이사, 최소보장임대료 해당 점주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뉴스1]






이날 표준계약서 도입 협약식에는 “계약서도 좋지만 라이더의 안전을 좀 더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보험료를 낮출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절실하다”(서비스일반노조 배달서비스지부 김영수 대표)는 요구가 나왔다. 을지로위원회의 현재 명칭은 ‘을(乙)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다.

심새롬·김효성·김홍범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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