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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쿵푸스타'가 사랑하고 잠든 도시

시애틀 - 이소룡

이소룡은 대학시절 철학, 심리학, 스포츠 생리학 등에 심취해 많은 독서를 했으며 그의 절권도는 노장사상과 선불교를 접목한 철학적 면모로 조명되기도 했다.

이소룡은 대학시절 철학, 심리학, 스포츠 생리학 등에 심취해 많은 독서를 했으며 그의 절권도는 노장사상과 선불교를 접목한 철학적 면모로 조명되기도 했다.

시애틀에는 세계적인 기업 아마존, 마이크로 소프트, 보잉 등 대기업 뿐아니라 시애틀 출신의 유명인들이 많다.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 지미 핸드릭스, 너바나 밴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무술 영화의 지존 이소룡(브루스 리)의 무덤이 홍콩이 아니라 시애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애틀은 이소룡이 학창시절을 보내고 아내를 만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일군 곳이다.

억눌려 살던 중고등학생 시절 만사가 힘들어 우울해지면 몰래 영화관을 찾아 허상과 환상에 젖어 현실을 잊고 도피했다. 특히 노란 운동복 차림에 쌍절봉을 휘두르며 날렵하게 날아올라 상대를 눕히는 이소룡 영화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장검을 휘두르는 일본인에 맞서 어깨, 허리, 양쪽 겨드랑이 사이를 바람소리 내며 현란하고 번개같이 움직이는 쌍절봉을 휘두르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숨죽이며 영화에 몰입했던 '정무문'의 장면들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정무문'은 일제시대 일본의 압제로 탄압받는 중국의 무술도장에 이소룡이 나타나 출중한 무술로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도장을 살려낸다는 구태의연하고 권선징악적인 뻔한 무술영화였다. 하지만 이소룡의 외모, 날렵한 몸매, 상대를 제압하는 특유의 괴성, 빠르고 역동적인 무술 솜씨에서 나오는 카리스마에 열광했었다.



이소룡(본명 이진번)은 경극배우였던 아버지가 미국 공연을 다닐 때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11월27일 태어났다.

이소룡이 남긴 메모.

이소룡이 남긴 메모.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은 이소룡이 태어난 후 가족을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갔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자라면서 쿵후의 일종인 영춘권을 배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불량학생이었다. 싸움질이 점점 심해지자 부모는 1959년 4월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어주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고모에게 보냈다. 이후 시애틀로 옮겨가 아버지의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 연극과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철학, 심리학, 스포츠 생리학 등에 심취해 서재에 2500권의 책을 쌓아두고 많은 독서를 했다.

이소룡은 영춘권에 복싱, 유도, 카라데, 태권도, 동남아 무술을 혼합해 자신의 신체 특성에 맞게 개발해 절권도를 만들었다. 1959년부터 도장을 열고 무술(Jun Fan Gung Fu.진번쿵후)을 가르쳤다.

시애틀 가필드 하이스쿨에 쿵후 시범을 갔다 여고생 린다 에머리를 만났다. 에머리는 쿵후 제자가 되었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1964년 8월 그와 결혼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배우의 꿈을 키웠으나 성공하지 못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가족과 홍콩으로 돌아갔다. 1970년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예전의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인기였다.

이소룡은 1971년 무술영화 '당산대형'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스타가 되었고, 1972년 '정무문'으로 본인의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1972년 이소룡은 영화사를 설립하고,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을 발표해 다시 신기록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섰다.

1973년 7월 20일 '용쟁호투' 개봉을 6일 앞두고 약물 과민반응에 의한 뇌부종으로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가 남긴 메모와 일기, 대화와 인터뷰를 통해 노장사상과 선불교를 접목한 절권도의 철학적 면모가 크게 재조명 되기도 했다.

이소룡에 의해 중국무술이 세계화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무술은 이소룡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소룡을 로큰롤의 엘비스, 농구의 마이클 조던, 권투의 무하마드 알리와 비견한다."(영화평론가 김봉석의 '이소룡 다시보기' 중에서)

사망 이후 미망인 린다 에머리는 남편의 시신을 시애틀로 옮겨와 레이크 뷰 세미터리(Lake View Cemetery)에서 장례를 치뤘다. 이소룡의 묘 옆에는 93년도 영화 '크로우'를 찍다 총기사고로 28세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이소룡의 아들 브랜던 리도 함께 묻혀 있어 심금을 울린다.

찾아간 레이크 뷰 묘지는 넓기도 하지만 이소룡 묘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찾기가 힘들었다.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위치를 물어봤더니 시애틀 동쪽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면 분명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묘지가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사망한지 45년이 지났는데도 그를 추모하는 참배객들이 있었다.

이소룡 묘 앞에 서니 이소룡 머리를 하고, 쌍절권을 흉내내보기도 하고 기합소리를 질렀던 가물가물한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시애틀 차이나 타운에 소재한 윙 루크 박물관(Wing Luke Museum of the Asian Pacific American Experience)에는 이소룡 관련물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었다.


신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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