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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매입해 농장 경영…사회 활동도 적극 참여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도산 공화국(33)
리운경 가족①

1910년 인구센서스에 W. K Lee 6명 가족 기록
샌라파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살아
1917년까지 레드랜드 지방회서 서기로 근무
회관 건립 후 매주일 두번 씩 모여 성경 강론
도산의 헌신과 노력에 감사하는 연설자로 나서
지진 났을 때는 중국인 일본인도 공립관에 피신


▶리운경의 본명

리운경의 본명은 리원길인데 1910년 리운경으로 개명했다. 신한민보 1910년 1월 12일자에 "개명 광고. 본인의 성명 이원길(李元吉)을 고쳐 이운경(李雲卿)이라 행세하오니 동포들께서는 조량하시압. 1월 10일 이운경 고백"이라고 보도됐다.

1910년 인구 센서스 파차파 캠프 거주자 명단에 따르면 W. K. 리(W K Lee)아래에 총 6명이 있다. 미시즈 W. K. 리(Mrs. W K Lee), 숨니 리(Shumney Lee), 윌리엄 리(William Lee), 에스더 리(Esther Lee), 에디 리(Addie Lee), 캐더린 리(Kathrine Lee), 김씨 리(Kimpsi Lee)이다. 김씨 리는 이운경의 어머니이고 미시즈 W. K. 리는 이운경의 부인이다. 나머지는 이운경의 자녀들인데, 리버사이드 국어학교를 다녔던 리순희, 리윌링, 리이시다, 리에디, 리계선이다.



▶샌라파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

1905년 이원길(이운경)은 샌라파엘(San Rafael)에 있었다. 공립신보사를 위하여 5원을 연보했다.

공립신보 1905년 12월 6일자는 "最受新聞. 산르에팰에 류하는 리원길 씨가 공립신보사를 위하여 금 5원을 연보하였더라"라고 적도고 있다.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했다. 1906년 3월 샌프란시스코 학생회에서 리원길은 영어로 연설했다. 연설의 주제는 죽은 학문이 아닌 산 학문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공립신보 1906년 3월 28일자 내용이다. "학생연설. 상항 학생회 학생들이 금월 제3 토요일 석에 개회하고 연설하였는데, 죽은 학문을 힘쓰지 말고 산 학문을 힘쓰라는 문제를 대하여 영어로 연설한 이는 리원길, 김관유 양 씨오 한어 연설한 이는 이재렬 씨인데 연설이 재미가 있었더라." 1906년 4월 5일 공립협회 창립 기념 제1차 연환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태극기와 미국 별기를 서로 어긋나게 높이 달았다. 이원길은 애국가를 노래했다.

▶안창호와의 만남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오자, 이원길은 샌프란시스코 학생회 서기로서, 안창호에 대한 감사 연설을 했다.

공립신보 1906년 4월 14일자 내용이다.

"총장 환영. 공립협회 총회장 안창호 씨가 상항에 온다는 말은 전호에 기재하였거니와 거월 25일에 LA로부터 화륜차를 타고 상항에 도착하였는데 상항 지방회와 학생회에서 이교담, 이원길, 방화중, 이성우 4씨로 영접위원을 선정하여 정거장으로 마조 가서 일등마차에 총회장을 인도하여 공립관으로 처소를 정하고 그날 밤에 모든 회원이 일제히 모여 환영회를 열고 예식원 김찬일 씨가 예식을 지휘하고 먼저 환영회의 취지를 설명한 후에 학생회 서기 이원길 씨가 연설하기를, 안창호 씨는 우리의 대표자로 여러 동포를 위하여 각처로 순행하며 매우 수고하므로 한인의 사회가 오늘날에 이렇듯한 좋은 형편을 이루었으니 우리는 해씨를 대하여 감사하노라 하였고, 그 후에 모든 회원들이 일제히 노래를 화답하였고, 그 후에 총회장 안창호 씨가 연설한 대개는 LA와 레드랜드와 리버사이드 각 지방회에 매우 재미있고 많이 진취됨을 설명하고 지방회 없는 각 지방에 있는 회원들도 그 정형이 날로 새롭다 하고 그중에 LA는 지금 한인의 수효도 적지 않거니와 한인의 사회를 위하여 튼튼한 단체를 이루었고 열심이 매우 많으며 레드랜드도 전일에 비하면 서로 사랑하고 단합됨이 괄목상대하겠고 대저 오늘날 형편을 보게 되면 우리 공립협회에 효력이 매우 많다하였더라. 그 후에 송석준 방화중 양 씨도 연설하였고 하오 12점에 폐회하였더라."

1906년에는 지진이 나서 한인들이 무사한지 조사했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도 불을 피하여 공립관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공립신보 1906년 4월 25일에는 이렇게 보도돼 있다. "화재혹어지진(火災酷於地震). 상항에 한인 공립관은 4월 18일 오전 5시 15분에 지동할 때에는 손해를 면하였으나 종시 화재를 면치 못하고 전수히 소화가 되었너라. 지동할 때에 공립관에 있던 한인 무사하나 한인 미션과 미국 집에 있는 한인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김관유, 서정우, 리교담, 리원길 4씨로 하여금 각처에 탐지하고 각처에 있는 한인들도 회관으로 와서 안부를 무르니 상항에 있는 한인은 다 무고하더라. 그러나 각 찬관이 전폐되고 각 식물가 가에는 식물이 절종되매 면보 떡 한 개에 50전으로 1원까지 하나, 또한 살 수 없고, 또한 불 피우는 것을 금하는 고로 여간한 쌀과 물은 있었으나 밥도 지어 먹을 수 없고 사처로 다니다 못하여 겨우 조그마한 과자 4개를 사다가 한 개씩 먹고 그날 밤을 지날새 청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불을 피하여 공립관으로 찾아와서 같이…."

▶레드랜드 지방회 활동과 실업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이원길은 레드랜드에서 살았다. 레드랜드 지방회에서 서기로 일했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자 내용이다. "자지동회보고에 의하면 이운경은 레드랜드 지방회에서 대리 회장으로도 일했다. 1910년에는 레드랜드에서 흥업주식회사에서 서기를 맡았다. 1910년 이운경은 레드 랜드에서 이원석, 이무경과 함께 3300원 가치의 전토를 매입하였다."

'신한민보' 1910년 10월 05일 "안위원의 순행기. 13. 레드랜드 지방. 이곳은 본인의 거류하는 지방이온바 그간에 출타한 지 40여 일만에 돌아와 보온즉 동중이 전보다 새롭게 되는 각항 사업이 진보되었사옵기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옵거니와 본원의 출타한 동안에 이같이 진취되었사오니 본원이 있을 때에 사업에 진흥치 못함은 본원의 허물로 아나이다. 그동안 동포의 사업을 대강 말하건대 박창호, 리운경, 리원석, 리무경 제씨가 3300원 가치의 전토를 매입하였고 장학천 씨는 황찬일 씨와 세탁업을 동사하였고 김영근 씨는 박인환 씨와 생업을 동사하였기로 계약되었고…."

신한민보 기자는 레드랜드 지방은 실업 활동과 가산이 타 지역보다 우수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교육시설이 부족하다고 했다. 기사에 따르면 1911년 이운경은 레드랜즈에서 3천 원짜리 전토가 있었다.

신한민보 1911년 6월 7일자 보도다. "남방 동포의 정형. 으레들랜드에는 동포의 생활 정도와 실업 발전과 가산 배고파 타 지방보다 우승한 점이 많으니, 리운경 씨의 3천 원짜리 전토와 안석중 씨의 4천 원짜리 황무지와 리치완 씨의 1천 5백 원짜리 가대와 안석중 씨의 1천 2백 원짜리 두 가대와 정지영 씨의 1천 2백 원짜리 가대와 최인성 씨의 8백 5십 원짜리 가대와 박경환 씨의 신축한 가옥과 김영근 황찬일 씨 등의 두 빨래집과 김룡호 박창호 박능선 씨 등의 자농하는 농장이며 기외에 여러 가지로 실업의 경영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작년에 큰 화재를 당하였지만은 분별하는 마음이 더욱히 왕성하여 300여 원을 들여 회관을 새로 건축하였으며 서양 교회에서 허여한 회당이 있어 매주일에 두 번씩 모여 성경을 강론하는데 다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교육상에 관하여 특별히 설비한바가 없으나 다른 일에 발달된 것을 미루어 보면 이도 또한 오래지 아니하여 마련될 줄 알겠으며…"

<34회로 계속>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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