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2/3 ‘폴리파머시‘ 약 많이 주는 ‘병원 쇼핑‘

연말기획:한인사회 소외된 노년의 삶(7)
[LA중앙일보] 12.06.17 19:25
LA한인타운에 위치한 약국에서 한 할머니가 진열대를 살피며 약을 고르고 있다.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계없음. 김상진 기자
옛 시절 습관 "약이 최고"
44% 불필요한 약 처방받아

약 먹기위해 밥 먹는 현실
'떼쓰면' 주는 병원도 문제


"쉰 하나에 미국 왔제. 한국서 살 때는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식당서 온종일 일하고도 타이레놀 하나 먹으면 암시랑도 않게 다음날 일 나갔다. 진통제 한 알 딱 먹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기에 바빴지."

만병통치약 맹신

LA다운타운 노인아파트에 사는 이삼호(79) 할머니는 매일 10개가 넘는 알약을 삼킨다.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아프면 습관처럼 집어 들었던 타이레놀부터 위장약·근육이완제·소화제 등 가지 수도 셀 수 없다.

의사 처방 외에 직접 사먹는 약도 여러 가지다. 혈압약은 2가지 종류를 복용한다. 진통제는 주로 '애드빌(Advil)', 그마저도 잘 듣지 않을 땐 강도가 더 센 '넘버3(No.3)'다.

다량의 약을 한 번에 섭취하면 몸이 망가진다는 걸 할머니도 안다. 그래도 약이 최고다. 할머니는 "몸을 버리든가 말든가. 우선은 아프니까"라고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중풍까지 겪은 할머니의 몸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마저 버겁다고 느낄 만큼 노쇠해졌다. 이 할머니에게 약은 검증되지 않은 에너지인 셈이다.

"딸이 약 좀 그만 먹으라 하대. 근데 약 많이 먹고 죽나, 아파서 죽나 매한가지 아니겠나. 아침에 일어나면 아파서 설설 기어 다니는데 지금 당장 안 아픈 게 우선이지."

약 쇼핑 '폴리파머시'

시니어 약 과다 복용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여러 약제를 동시에 복용하는 환자를 뜻하는 '폴리파머시(polypharmacy)'는 미국 의료계의 주요 화두가 됐다. 폴리파머시 대부분은 65세 이상 시니어 층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시니어 인구 가운데 남성은 절반 이상, 여성은 3분의 2 이상이 '폴리파머시'다. 시니어 중 44% 이상이 불필요한 약 한 가지 이상을 처방받고 있다. 폴리파머시 시니어일수록 오히려 건강은 좋지 않다는 노인학회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하루 약 5~9개를 복용하는 시니어는 그보다 적게 약을 복용하는 노인보다 '고혈압·당뇨·심장마비' 등으로 인한 신체쇠약 발생 확률이 2배 이상 높다.

지난달 29일 LA한인타운에 위치한 병원 2곳을 찾아 시니어 약 복용 현황을 알아봤다. 시니어 대부분 평균 4~5가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수술을 받은 시니어는 2~3가지 약을 추가로 복용했다.

70대 할머니는 "약 많이 주는 병원으로 소문나면 할망구들이 그리로 다 몰려가. 약 많이 주는 병원이 최고지"라고 했다.

한 80대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아도 '어디가 아프시냐' 묻고 증세에 대한 약을 처방하는 게 전부"라며 "약을 먹으면 어지럽고 속이 쓰린 경우가 종종 있어 예전과 달리 약을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3C메디컬클리닉 김영욱 원장은 "방문 병원이 많고 진료 범위가 넓은 노인 환자는 자연히 복용약도 늘 수밖에 없다. 환자가 많은 약을 복용한다고 해도 질병에 맞는 약을 알맞게 복용한다면 '과용'이라고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부분 의사가 자신의 진료 분야 내에서 적절한 처방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상적인 증세 때문에 요구하는 감기약·위장약 등은 처방을 거절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불필요하게 처방받은 약이 쌓여간다면 방문간호사(Home Visit Nurse) 시스템을 이용해 이를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약 과다복용은 위험

시니어가 자주 복용하는 약 중에는 함께 복용했을 때 매우 위험한 조합도 존재한다.

지난해 미국의사협회저널(JAMA) 발표에 따르면 아스피린과 관절염 치료제를 함께 섭취하면 '출혈·위궤양·천공'이 발생할 수 있다. 고혈압 치료제와 비타민 B3를 같이 복용하면 '근육 손상·근력 저하·신부전증' 등을 유발한다.

이 외에도 '섞이면 위험한 폭탄약 조합' 15가지가 해당 논문에서 소개됐다. <본지 2016년 4월 26일자 A-3면>

최영옥(87) 할머니는 "약을 보약처럼 먹는 친구들이 많다"며 "약을 타기 위해 메디케어·메디캘을 남용하는 노인, 환자가 요구하는 약을 일단 주고보는 병원 둘 다 문제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약에 의존하는 시니어에게 '밥'은 약을 먹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빈속에 약을 먹을 수 없으니 억지로라도 밥 한 술 떠먹는다. 영양을 고려한 식단이 가능할 리 없다. 물에 밥을 말아 반찬 몇 가지와 먹는 일이 다반사고 어떤 때는 과일이나 채소로 식사를 대신 한다.

병원을 찾은 한인 할머니의 점심 식단을 물었다. 김모 할머니는 '오이', 최모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김치와 물에 만 밥'이다.

최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어떤 때는 약이라는 게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 약 때문에 밥 먹으면서 겨우 버티는 삶이잖아. 주변에 약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 노인들도 많아. 근데 그렇게 억지로 버티면서, 참으면서 사는 것도 죽음만큼 버겁지 않겠어…."

김지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