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딸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를 지경이야"

연말기획:한인사회 소외된 노년의 삶(1)
[LA중앙일보] 11.13.17 20:59
연말이 다가올수록 홀로 사는 노년층의 외로움은 더욱 단단해진다. 한 여성 노인이 한인타운 내 버스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김상진 기자
일 년에 자식들 한 번 볼까말까
애들 보고 싶어 '꾀병'부리기도

"집에 틀어박혀있는 게 덜 외로워"
"전화라도 해주면 너무 고맙지"


중앙일보는 연말을 앞두고 우리 어르신들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 봤습니다. 어떻게 살고 계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고, 그 분들이 느끼는 고민과 외로움, 행복 정도는 어떤지를 직접 물었습니다. 한인 노년층의 실제 삶을 조명합니다. 노인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름 앞둔 지난 8일 LA한인타운 한 노인아파트는 적막했다. 아파트 입구 문 옆에 붙어있는 거주자 안내판을 봤다. 'Kim' 'Lee' 'Park' 등 익숙한 성씨로 한인 시니어들이 대부분 거주했다.

출입문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성거리던 한 할머니가 "젊은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취재하러 왔다고 답하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취재해서 뭐 하려고. 재미도 없을 텐데…"라며 로비로 안내했다. 발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질 정도로 조용했다. 간간이 들리는 말소리와 기침 소리, 지팡이 끄는 소리만 들렸다.

로비에는 어르신 서너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양반이 여긴 왜 왔느냐"는 질문을 또 받았다. 이곳에서 젊은 사람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인이었다.

"추수감사절이랑 연말에 계획은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평소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겠지"라고 답했다. 대답에는 깊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80대 이진순(가명) 할머니는 "연말이라고 특별할 게 있나. 그냥 평소처럼 혼자 보내야지. 자식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바쁘니까 먼저 연락하기 눈치 보여. 전화라도 해주면 좋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 할머니는 얼마 전 타주에 사는 손녀딸이 보고 싶어 아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아들은 먹고살기 바빠 올해는 엄마를 만나러 오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섭섭해도 어쩌겠어.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말아야지." 익숙한 듯 말하는 할머니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로비에 계신 분들께 자식들과 얼마나 자주 왕래하는지 묻자 일제히 한 할머니를 가리키며 "저 이 빼고 거의 다 못보고 산다"고 입을 모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들이 아파트로 찾아오는 70대 김금례(가명)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부분 1년에 한두 번 정도 자식들과 만난다고 답했다. "쓰러지거나 병원에 들어갈 때, 병원에서 나왔을 때 며칠 빼고는 보기 힘들어. 꾀병을 부리는 노친네들도 있다니까."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툭 한마디 하신다. "남의 집 화목한 모습을 보면 내 인생이 덧없게 느껴져. 홀로 지내야 하는 설이나 추석, 크리스마스면 유난히 더 심해. 아예 그런 생각 안 하려고 집에만 틀어박히는 게 낫지."

어르신들은 빠듯한 살림을 꾸리는 자식들에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은 사치이자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여겼다. 외로운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식한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꾹꾹 참는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시니어들은 정부보조 간병인에게만 의존하고 있다.

70대 송모씨는 "그래도 나처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근처에 바람이라도 쐬러 갈 수 있지만 치매에 걸렸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간병인 없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기 어렵다. 아들딸과 손주들은 더 멀어지고…"라면서 "옆집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다"고 전했다.

노인아파트는 '이별'이 흔하고 자연스러운 곳이다.

김광조(78·가명) 할아버지는 "이곳에 살다 보면 구급차가 자주 오는 걸 볼 수 있어.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려두고 깜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라고 말하면서 "구급차가 몇 번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다가 어떤 노인이 안 보이면 그냥 '아, 돌아가셨구나' 짐작하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구연자(69·가명) 할머니는 죽음보다 자신이 죽었을 때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더욱 두렵다고 했다. 할머니는 "남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아들내외를 보면 내가 죽어도 장례식 절차만 빨리 해치우고 끝낼 것 같다"면서 "젊은 시절 홀로 아들을 키우며 고생했던 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노인아파트 관리자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매니저 이모씨는 "현재 어르신 10명 정도가 건강상의 문제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라고 전했다. 이어 "안타까운 마음에 찾아뵙고 말동무를 해드리고 싶을 때가 많지만 사생활 침해 문제도 있고 해서 개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요. 외로움과 너무 오래 사셨기 때문에 외로움을 못 느끼시는 거 같아요."

취재를 마치고 나갈 채비를 하자 함께 대화를 나눴던 어르신들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낯선 젊은이가 찾아와 침묵을 깨고 말동무가 돼준 것이 고맙다고 했다.

노인아파트 로비에 있는 TV에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온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의 광고가 방영되고 있었다. "손녀딸이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를 지경"이라는 할머니와 "좀 전화라도 자주 해주지"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텅빈 로비를 울렸다.

정인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