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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은 재산 소유 못해…한 가족에 판잣집 한채

육성으로 듣는 미주 한인 초기 이민사:외로운 여정(33)
딸들 :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살았던 개척자 이메리(상)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 1년 계약
하루 단돈 50센트 밖에 못 받아
건초 더미 침대 자는 버릇 돼
16세까지 스프링 침대서 못 자


1905년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빼앗긴 한국을 떠났다.

한국을 떠난 여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남자는 멕시코 애니깽(에네켄) 농장의 노예로 살았다. 그 둘은 14년 후 북가주의 쌀 재배지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만나 결혼했다.

백경선은 이메리의 한국 이름이다. 그녀는 전도사였던 아버지 백신구와 어머니 송경도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가 5살 때 일본군의 습격을 피해 부모님, 큰오빠와 함께 인천에서 하와이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같은 해에 메리의 미래의 남편이 될 13세의 이흥만도 계모의 폭력을 피해 걸어서 인천까지 도망쳤다. 어린 소년은 혼자서 유카탄에 노예로 팔려 가는 배를 탔다. 이흥만과 이메리는 굶주림과 갖은 모욕을 이겨내고, 마음속의 적개심,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싸우면서 60년 이상을 한국 밖에서 방랑하며 살았다.

메리의 부모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들의 이름은 플로렌스, 샬럿, 에디, 영, 랠프, 아서, 스탠퍼드, 어니스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메리의 부모는 미국에 정착해 69명의 자손들을 두었다.

메리의 남편 이흥만은 1975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메리는 95세의 나이로 1995년에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1977년의 인터뷰에서 76세의 이메리는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기독교로 개종한 분들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학교 교사였다. 나와 큰오빠는 새뮤얼 모핏 박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모핏 박사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와 더불어 평양에 왔던 최초의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어머니는 기독교 전파를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동네 여자들을 전도해 결국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어머니는 개종한 동네 여자들에게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쳤다.

그 당시 사람들은 종이와 연필이 없었다. 하지만 흙으로 된 부엌 바닥에 막대기나 석탄을 이용해서 쓰기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성경책을 교재 삼아 동네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오직 남자들만 교육을 받았던 당시 풍습이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성 차별 없는 배움을 강조했다.

이후 어머니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를 알리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해 배움을 원하는 여학생들을 모집했다.

일본군이 우리 동네까지 쳐들어와 점령했다. 결국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났다. 나는 당시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일본군들이 동네 어귀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온 동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밤낮없이 수마일을 걸어 인천항에 도착했다.

돈도 없고, 직업도 잃었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정든 고향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인천항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이 큰 배 두 척을 정박시키고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찾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들의 배에 올라 1년 계약 조건으로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건너왔다. 우리는 먼지가 뽀얗게 쌓일 때까지 사탕수수 밭에서 일을 했지만, 하루에 단돈 50센트밖에 받지 못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1년간 머물고 나서 1906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해에 샌프란시스코에는 큰 지진이 발생했었지만, 우리는 배와 기차를 타고 무작정 그곳으로 떠났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릴 때 많은 백인 남자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한 남자가 발로 어머니 치마를 걷어차고 내 얼굴에 침도 뱉었다.

아버지에게 우리가 왜 이런 곳에 왔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웃으면서 나중에 얘기해주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인간들은 어느 곳에서든 같은 존재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제임스 게일과 모핏 박사가 평양에 갔을 때, 한국 소년들은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돌을 던지고 "백인 악마들"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 소년들은 자신들과 외모가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한국의 소년들이 보기에 백인들은 한국인들보다 훨씬 크고, 밝은 머리색과 파란 눈을 가진 신기한 존재였다. 익숙하지 않은, 신기한 것을 접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거칠게 행동한다.

아버지는 미국 선교사들이 평양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들 또한 미국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백인들에게도 노란 피부의 우리가 더러워 보이고 영어를 제대로 못하니 무식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대를 받았으리라.

우리 아버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목사였고 매우 너그러웠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아버지는 그러한 좋지 않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아버지는 그런 삶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대신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캘리포니아로 온 첫 한국인들은 리버사이드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아시아인들에게 주어진 일은 오렌지, 레몬, 호두 같은 작물을 농장에서 따는 일 뿐이었다. 백인들이 우리를 '더러운 중국인들'이라며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은 한국이란 나라도 전혀 몰랐다. 단지 우리를 모두 '칭크들'이라고 싸잡아 불렀다. 나는 이러한 대우를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나 역시 우리에게서 김치, 고추장, 마늘 등 한국 음식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시아인들은 개인 소유의 재산도 모을 수 없었다. 1906년에 우리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철도 건너편 동네의 외곽에서 살았다. 그곳에 닭장같이 작은 판잣집이 있어서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판잣집들은 철도 건설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중국인 막노동꾼들이 살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그 중국인 철도 노동자들은 18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역 인부들은 침대 사이가 1~2인치에 불과한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만 했고, 창문이나 선반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딸린 가족의 수에 상관없이 한 가족에 판잣집 한 채만 배당되었다.

작은 닭장과 같은 그곳에서 하와이에서 태어난 명이와 나, 어니가 살았다. 거실이 너무 더럽고 먼지가 많아서 우리는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기발하게 2층 침대를 고안해냈다. 벽을 따라 바닥에 놓을 선반들을 만들고, 그 위에 건초 꾸러미를 올렸다. 그때 건초로 만든 침대에서 자는 것이 버릇이 되어 나는 16세가 될 때까지 스프링 침대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제공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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