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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결혼은 남지 않는 '장사' 인가

이기희/작가

'남자는 펼쳐진 책과 같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남편 우서방이 날 꼬시려고 포춘쿠키 안에 끼워 넣었던 문구다.

요즘 연속극 보면 하트 모양 촛불 켜놓고 장미꽃잎 뿌려진 길 따라가면 흰색 턱시도 말끔히 차려입은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가 세레나데를 부르며 사랑을 고백한다. 빛 바랜 누런 색 쿠키에 적힌 글에 감동 먹고 넘어간 내 팔자라니.

그래 우리는 구닥다리라서 그렇다고 치자. 초고속 신세대 내 딸은 브루노마스 콘서트에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울려퍼지는 순간 프러포즈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시큰둥하다. 연속극을 너무 자주 본 탓인가. 그날이 아빠 생일날이어서 사려(?) 깊은 이벤트였다며 아빠 닮은 남자 만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니 무슨 날벼락! 자신은 약혼, 결혼 선물 못받고 결혼기념일을 그냥 지나쳐도 딸은 이 세상 온갖 것 다 주고받으며 혼사 치르고 공주처럼 대우 받는 곳에 시집 보내고 싶은 게 딸 가진 부모의 소망이다.

여느 집이 다 그렇겠지만 내 딸도 본시 공주로 태어나 애지중지 공주처럼 길러 자타가 공인하는 공줏과로 이런 공주와 결혼할 상대는 분명히 왕자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득한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안개 자욱한 꽃밭을 백마 타고 단숨에 달려와 내 딸을 낚아 챌 늠름하고 멋진 왕자님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떨렸는데 딸은 왕자 대신 선한 평민을 택했다. 신랑감은 핸섬(?) 하고 체격 건장한, 24시간 딸에게서 눈을 못 떼는 보다가드형 기사. 스스로 벌어 학비 대고 아파트까지 장만한 근검절약형이라는 말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우리 편에서 보면 손해 보는 기분인데 신랑 쪽에서 보면 판결문이 달라진다.

혼사는 장사가 아니다. 어느 쪽도 이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저울의 추는 어떤 상황에도 자기들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가슴 한 군데에 비어있는 이 허전함은? 결국 나도 세상사에 합류한 속물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경멸하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포장된 나의 참모습을 본다.

그러고 보면 그 나물에 그 밥, 딸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처음 중국계 우서방을 만났을 땐 그는 무일푼, 여동생과 동업해 중식당을 했는데 번 돈은 여동생이 챙겨가고 월급 받는 반푼수. 죄송해요. 요럴 땐 우서방이 한글 못 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거기에다 내가 싫어하는 삼종 세트-까만 피부, 작은 키, 넓은 콧망울-를 완벽하게 갖추었는데도 눈에 흙이 들어갔는지 귀태 나고 든든해 보였었다. 사람은 오래 함께 살아봐야 안다. 배려와 인내가 사랑은 만든다. 우서방은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나 먹으라고 챙겨주고 자기는 안 먹는다.

고대 그리스에선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했는데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결혼은 사랑을 지켜내는 의무다. 'Eudaimonia'는 'eu(좋은)+daimon(영혼)'라는 의미다. 좋은 영혼의 만남이다. 결혼은 아름다운 영혼의 만남이다. 다듬어주고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서로의 가슴에 별을 달아주는 일이다. 사랑의 근본은 배려와 믿음이다.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는 신뢰와 정성이 사랑을 키운다. 공주에겐 화려한 왕자보다 믿음직한 기사가 필요하다. 어렵고 힘든 한 세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의 우산 펼쳐들고 든든한 지켜줄 기사가 공주를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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