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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큐-박정희 린든 존슨 그리고 베트남전쟁] ②냉정한 케네디…'월남 파병' 품고 갔으나 '백악관 찬바람'에 실망

케네디의 세계 공존 질서 비전에 5.16으로 흠집
헌법적이지 않은 지도자 탄생 '색안경'으로 일관
자유진영 위기 이용 돌파구 찾아 1961년 미국행

존슨과 회담하기 위해 오벌 오피스에 앉은 박정희는 1961년 11월을 떠올리며 달라진 자신의 위상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미스터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더는 장군 또는 의장이 아니었다. 존슨 정부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3년 6개월 전 같은 곳에 앉았을 때 박정희는 백악관의 주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눈치를 살펴야 했었다. 5.16 이후 6개월 만에 워싱턴을 방문한 그는 반란군의 리더였다. 해방 직후의 혼돈 한국전쟁 4.19와 같은 역사의 도전과 시련을 이기고 이제는 한국도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에 전념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정부를 전복시켰다. 헌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지도자가 탄생한 역사가 없는 미국 정부에 박정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더욱이 상대는 케네디였다.

케네디만큼 박정희와 어울리지 않는 상대도 없을 듯하다. 케네디는 ABCDE로 정리할 수 있다. Affluent(부유) Bookish(학구적) Cultured(문화적) Debonair(신사적) 그리고 Engaging 즉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보스턴의 대표적 부유 집안에서 자란 하버드 출신 케네디는 대필 의혹이 있기는 했지만 무게 있는 역사 인물전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학자.문인.언론인.예술가 등이 끊이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할리우드 스타들과도 가까웠다. 멋있는 외모와 매끄러운 매너가 그의 인기에 일조했다.



케네디의 이미지에 박정희와 연관된 키워드를 대비시켜 보면 이 둘의 양극성이 쉽게 보인다. 가난.군인.과묵.고독 등과 기존 질서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부조화했던 반골기질. 주위 사람들이 받은 박정희의 첫 인상은 대충 두 개로 정리된다. 작은 키와 검고 마른 얼굴. 부인 육영수 여사도 처음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니 뛰어난 외모가 아님은 확실하다.

이 두 지도자의 차이는 성품 이미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케네디의 원대한 비전에 흠집을 낸 인물이다. 그의 에고에 상처를 냈다. 미국을 새로운 역사의 지평으로 이끌고 나갈 횃불로 자신을 파악했던 케네디다. 그의 취임사는 한편의 서사시처럼 읽힌다. '오늘'은 하나의 '끝'과 또 하나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했다. 자신의 등장을 옛 것의 마지막 새 것의 첫 걸음으로 상정하려면 상당한 자신감이 요구된다.

케네디는 모두가 공존 공영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짜겠다고 했다. 강자는 정의롭고 약자는 지켜지고 평화가 유지되는 세상이다. 그가 말한 약자란 열강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빈곤한 나라들이다. 케네디는 이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자유와 자조(自助). 자유를 누리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만일 자유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도울 수 없다면 부유한 소수도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인들과 자유세계를 가슴 벅차게 한 이 선언 후 4개월 뒤 박정희는 고작 3500명의 반란군으로 미국의 대표적 지원국가 60만 대군의 나라 한국의 합법 정부를 뒤엎었다. 쿠데타를 보고받은 케네디가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낸 사실은 잘 알려졌다. 이토록 그를 실망케 한 반란의 주인공이 백악관을 찾아왔다.

케네디가 백악관 정문에서 박정희를 영접하는 사진을 보자. 철 지난 은어에 '썩소(笑)'란 것이 있다. 케네디의 어색한 웃음이 바로 그것이다. 엷은 미소가 입 주변에 맴도는 듯하지만 얼굴 전체에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케네디가(家) 사람들은 이를 훤히 드러내며 웃는다. 특히 형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와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전 연방상원의원의 치열 노출 웃음은 유명했다. 박정희를 맞는 케네디에게 그런 웃음은 없었다.

오히려 박정희가 더 편해 보였다. 줄곧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권위적으로 보였지만 잘 웃었고 케네디와 달리 양복 윗도리 단추를 풀어 놓은 모습도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박정희는 미 언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신문.잡지들은 박정희를 이해할 수 없는 옹고집으로 혁명정부를 권위주의적 폐쇄집단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외모를 자주 걸고 넘어졌다. 시사주간지 'TIME'은 그에게 별칭을 가장 많이 붙여준 언론 매체다. '매의 얼굴을 가진 수수께끼(hawk-faced enigma)' '무표정하고 뾰족한 눈을 가진 보스(the flinty gimlet-eyed boss)' 심지어는 '촌놈(country boy)'이란 표현도 있었다.

겉보기에 박정희와 케네디의 만남은 의전과 외교적 수사 측면에서 모자람이 없었다. 케네디와 그의 주요 장관들은 적잖은 시간을 박정희와 함께 보냈다. 특히 한.미 공동성명은 시쳇말로 '표준답안'이었다. 혁명정부를 치켜세우면서 양측이 모든 면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중함 속에 냉정함이 있었다. 혁명정부를 향한 미국의 메시지를 정리하면 '아직 잘 모르겠으니 두고 보자'였다. 박정희가 이 조심스럽고 어정쩡한 태도를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똑 부러지는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워싱턴 방문에 앞서 박정희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통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받았다. 1961년 11월 5일 청와대로 박정희를 찾은 러스크는 먼저 경제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을 새롭게 하려는 혁명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외교적 발언을 했다. 이어 케네디가 베를린사태로 야기된 세계적 긴장국면에 대해 대화하길 원한다고 전했다.

소련이 자유세계와의 정면충돌 코스로 들어선 것 같다는 얘기를 하려는 의도였다. 러스크 방한 5일 전인 10월 30일 소련은 수소폭탄 공중 투하 실험에 성공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3800배 파괴력을 과시했다. 흐루시초프가 서방을 매장하겠다고 소리친 지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같은 시기 베를린에는 장벽이 세워졌다. 서방은 초긴장의 상태였다.

박정희가 방미할 즈음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혁명정부는 경제발전에 사활을 걸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했다. 미국은 원조 수혜국의 장기적 발전을 목표로 설정한 만큼 도움을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적을 상대해야 했다. 수소폭탄 투하 능력에 힘입어 세계 곳곳에서 큰 규모의 도발을 자행할 태세를 갖춘 상대이다. 베를린.쿠바.한국.인도차이나 등이 가능성 있는 표적이다. 미국은 제한된 재원을 영리하게 사용해야 했다. 소련의 정면 도발을 억제할 능력 배양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박정희가 댐.공장.도로 신설을 갈망하지만 지금은 이를 위한 원조제공이 미 정부의 최우선이 아니다.

박정희는 글로벌 긴장상태에 직면한 미국에 더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제안을 하기로 했다. 평생 군인 박정희는 반공을 하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휘하에 60만 대군이 있다. 그의 전략적 계산에 월남이 들어왔다. 베트남은 베를린만큼은 안 돼도 동.서 충돌의 상징으로 미 외교 및 군사 정책의 도전으로 급부상 중이다. 박정희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 카드를 가슴에 품고 케네디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케네디의 냉랭함에 실망한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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