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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백악관에 자신의 그림 건 사나이' 원로 한인 화가 빅토르 빅토리씨

해외여행 힘들었던 시절에 화가의 꿈 안고 무작정 유럽행
초상화가로 명성 떨쳐, JFK동생·트럼프 등 5만여 명 그려
은퇴 후엔 '동네 명물'…뉴저지서 자유로운 창작생활 만끽


일반인들에겐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언감생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화가의 꿈을 품고 해외로 뛰쳐나온 한 청년이 있었다. 노화가 빅토르 빅토리(Victori.71)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지만 한때 초상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 자신이 그린 역대 대통령 초상화가 백악관에 걸린 것을 시작으로 빅토리씨는 5만여 명의 초상화를 그렸다. 현재 뉴저지주 러더포드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빅토리씨를 만났다.

빅토리씨는 1943년 경기도 부천(당시 소사)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미술가의 피가 흘렀지만 정작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마치고 그림을 수출입하는 한 회사에서 근무했다. 성모마리아와 예수 그림 등 종교화 사본이 당시 유행이었는데 사본 화가로 활동하게 된 것. 이때부터 빅토리씨는 '그림을 빠르면서도 잘 그리는 화가'로 정평이 났다.

남들보다 몇 배로 돈을 모은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서 화가의 꿈을 한번 펼쳐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당시 일반인이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 600만원을 털어넣고 나서야 간신히 비자를 얻었다. 홍콩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빅토리씨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역대 대통령 초상 백악관에 걸다

유럽 여기저기를 돌다 우여곡절 끝에 암스테르담에서 비자를 받아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향했다. 첫 도착지는 뉴욕이었지만 친구의 초대로 오리건주에 가게 된 그는 거기서 7개월 동안 작품활동에 매진한다.

돈이 없어 하루 한 끼만 먹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조지 워싱턴부터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까지 미국 대통령들의 초상을 모은 벽화 그림(Presidential Mural)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니) 사람들이 와서 그 그림으로 뭐 할 거냐고 묻더라. 그래서 백악관에 걸겠다고 했다. 백악관에서 그려 달라고 한 거냐고 묻더라.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다 웃었다.

그럼 어떻게 백악관에 (그림을) 거냐고. 여기는 오리건이고 백악관은 워싱턴DC에 있는데 그게 가능이나 하겠냐고. 그래도 나는 백악관에 걸 거라고 했다. 백악관에 걸 생각으로 그린 것이니까."

그러던 어느날 서류가방을 든 한 남성이 젊은 빅토리씨를 찾아왔다. 이 남성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도와주겠다'고 선뜻 제안했다. 남성은 포틀랜드시 감독관(City Inspector)으로 일하던 시정부 직원이었다.

남성은 백악관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백악관 측은 포틀랜드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그림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 박물관 관계자 네다섯 명이 빅토리씨의 스튜디오를 방문했고 몇달 뒤 백악관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그림을 가지고 백악관으로 와 달라고.

빅토리씨는 부랴부랴 룸메이트에게 몇백 달러를 빌려 교통비를 마련한 다음 백악관으로 가 그림을 기부했다. 그날 이후 빅토리씨의 삶은 달라졌다. '백악관에 그림 건 사나이'가 된 것이다. 이 초상화는 지금까지도 백악관에 남아 있다.

눈빛 살아 있는 디테일로 '차별화'

이후 몇년 동안은 초상화 주문의 연속이었다. 초상화 전문화가로 명성을 쌓게 된 빅토리씨는 전국을 누비며 미국의 여러 유명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등.

트럼프가 주문해 놓고 아직 찾아가지 않은 초상화 한 점은 지금 러더포트 자택 한 켠에 그대로 남아 있다. 트럼프는 빅토리씨를 두고 "내가 본 아티스트 중 최고다.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He's the best artist I've ever seen. I'm gonna make him rich)"라고 말했다는데.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부자들이 빅토리씨를 찾아와 그림을 의뢰했다. 이 기간 그의 초상화 고객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워싱턴DC 지역에 5000여 명 롱아일랜드 5000여 명 뉴욕시내 4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가 새 도시에 찾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렘트란트가 우리 동네에 왔다'며 줄을 서서 그를 기다렸다.

실제 모델을 앉혀 놓고 그린 그림이 3만여 점이고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 2만여 점을 합치면 모두 5만여 점이다.

79년 빅토리씨는 뉴욕에 정착했다. 지금 살고 있는 뉴저지 러더포드 집으로 이사했고 81년에는 파크애브뉴 헴슬리 빌딩에 갤러리를 차렸다. 그러나 비싼 렌트와 건물주 변경 등으로 갤러리는 2000년 문을 닫았다.

화려했던 과거는 다 지나고 이제 빅토리씨는 노년의 화가로 자신의 혼을 담은 마지막 작품 활동에 힘을 다하고 있다.

그는 '멀티플리즘(Multiplism)'이라는 새로운 풍조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스냅샷이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멀티플리즘은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뤄지는 움직임을 펼쳐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림이나 벽화, 조각 등 다양한 형태로 작업한다.

작품들은 러더포드 자택 안팎을 빼곡히 채운다. 조각상들은 정원을 메운다. 최근 작업하고 있는 작품은 '갓 앤 아이(God and I)'로, 무게 4만 파운드에 높이 20피트짜리 대형 조각상으로 제작하고 있다.

목표 완성 시기는 내년 여름께다. 조각상 아랫부분에는 타임캡슐을 만들어 100년 뒤에 열릴 수 있도록 했다. 빅토리씨와 그의 조각상은 이제 '동네 명물'이 됐다.

"평생 바쁘게 살았다. 하루에 14~15시간 일주일 내내 일할 때가 다반사였다. 지금 은퇴하고 나니 이렇게 환상적인 삶이 있는 줄 몰랐다. 자유롭다. 돈 걱정 자녀 문제 등에서 다 자유롭고 이제 남을 위한 초상화가 아닌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어서 좋다."

노화가의 말에서도 힘이 넘쳤다.

이주사랑 기자 jsrl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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