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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시계도 상품권으로 사는 중국 관광객

상품권 자유화 15년…연 10조 시대 풍속도

“신세계 가격 내려갔어. 1000장 살래? 50짜리.” “600원짜리 나왔는데 쓸래? 많지는 않고 3000에서 5000."

 27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 상품권 전문 판매 매장. 가게 주인이 컴퓨터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전화기 만지는 손이 바빠졌다. 50만원짜리 신세계백화점 상품권이 몇백원 싸게 거래되자 재빨리 5억원어치를 다른 거래처에 팔려고 했다. 원룸 크기의 사무실에 40대 남성 직원 두 명이 모니터를 보며 전화기와 스마트폰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벽에는 ‘본사는 현금 결제만 가능하며 카드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상품권 전문 매장이란 백화점과 구두회사 등에서 발행하는 상품권을 대량으로 구매한 후 할인해 판매하는 업소를 말한다. 롯데백화점 10만원권은 9만6500원에, 금강제화 10만원 상품권은 7만7500원에 파는 식이다. 백화점에서 명품 핸드백이나 전자제품을 살 때 상품권으로 구입하면 수백만원까지 차익을 볼 수 있어 최근 20, 30대에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마트 상품권으로 생활비를 아끼려는 주부들도 찾는다. 서울 강남역 인근의 이 건물에는 상품권 매장만 8곳이 몰려 있다.

 과거 상품권 매장은 신용카드를 현금화하는 ‘깡’의 통로로 활용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활성화를 위해 상품권 발행을 완전 자유화했다. 어떤 업체든 제한 없이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때마침 2000년이 넘어갈 무렵 테헤란로에 벤처 열풍이 불었다. 법인카드로 수억원씩 결제할 수 있어 벤처기업들은 상품권을 백화점에서 대량 구매해 전문 매장에서 할인해 부족한 현금을 융통했다. 강남역 인근에 상품권 전문 매장이 모여든 것도 이 무렵부터다.



노무현 정부 당시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가 강남 뒷골목을 휘젓자 상품권 전문 매장들은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 정부가 “문화사업을 활성화한다”며 도서상품권과 문화상품권을 사행성 게임 경품으로 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매장 관계자는 “상품권이 트럭으로 왔다 갔다 했었다”며 “연간 매출이 수천억원에 달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상품권 자유화 시행 후 올해로 딱 15년이 흘렀다. 이번 추석을 맞는 상품권 상인들의 표정은 어떨까. 지난 26일 점심시간 무렵 강남의 상품권 중심 건물은 대체로 한가한 모습이었다. 한 매장 주인은 “4~5년 전만 해도 추석 전 이맘때면 손님들이 복도까지 줄을 섰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직원이 10명 넘는 적도 있었다”며 “지금은 임대료도 감당하지 못해 혼자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경기를 정권 탓이라고 주장하는 상인들도 있다. 한 상인은 “이명박 정부부터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펴니까 우리같이 벤처기업에 의존하던 업체들은 죄다 망했다”고 주장했다.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는 상인들도 있다. 10년간 가게를 운영한 한 점포 주인은 “올해 초 한 달간 경기가 좋아져 이제 좀 살겠구나 했는데 세월호가 터지면서 또 꺾였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을 끼고 있는 서울 명동 거리 상품권 매장은 그나마 경기가 나은 편이었다. 26일 오후 찾아간 한 매장에는 고객들이 줄을 이었고, 상품권 가격을 묻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점원은 “지금은 인터뷰할 시간이 없으니 매장이 문을 닫는 오후 8시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명동의 활기는 추석 대목 덕분이라기보다는 요우커(중국인 관광객)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한 매장 관계자는 “명품 핸드백을 구매하는 중국인들이 최근 상품권으로 차익을 얻으려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1억원을 호가하는 고가 시계도 상품권으로 구매할 정도”라고 말했다.

 94년 5000억원에 불과했던 상품권 시장은 20년 만에 10조원대로 성장했다. 한국조폐공사가 올해 초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종이로 발행한 상품권이 2009년 3조3783억원에서 2011년 4조7785억원, 2013년 8조2796억원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모바일 상품권 규모까지 합하면 전체 시장은 10조원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종이 상품권 시장만 따져도 연간 30%에 가까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자 우려하는 시각도 나온다. 성태윤(경제학) 연세대 교수는 “강제 휴일 탓에 재무 여건이 나쁜 유통업체도 있을 텐데 상품권 밀어내기를 부족한 매출을 메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매출이 곤두박질치는 대형 구두업계를 지켜본 하청업체 직원들은 더욱 그렇다. 20여 년간 구두 하청업을 해왔던 박동희 성동제화협회장은 “대형 업체에서 1000만원 줄 돈을 70%에 불과한 상품권으로 대신 주는 관행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명절 때만 되면 우리 직원들이 상품권을 현금화하려고 강남이나 명동 바닥을 훑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업체 매출이 반토막이 나고 도산하는 것도 다 상품권을 많이 발행한 것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혀를 찼다. 실제로 금강제화는 매출이 2003년 4493억원에서 지난해 3485억원으로 떨어졌고, 에스콰이아는 판매 부진에 결국 올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백화점 직원들의 상품권 판매 실적 압박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명절 전 백화점에서 상품권 판매 특별팀을 꾸려 할당 판매액을 정해놓고 성과를 독려하고 있다. 한 상품권 매장 주인은 “백화점 직원이 더 이상 상품권 팔 곳이 없어 2호선 지하철을 두 바퀴 돌다 다시 회사로 들어간다는 얘기도 들린다”며 “개인 돈을 더 얹어 판매 권유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급하게 많은 돈을 굴리다 보니 관련 사기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말 서울의 한 대형 백화점이 2500만원어치 상품권을 유통하려다 중간에 자금이 사라진 사실이 발견됐다. 백화점에서 상품권을 유통업체로 보냈는데 들어온 돈은 다른 계좌로 입금된 것이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백화점 직원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해 돈을 빼가는 속칭 ‘네다바이’가 많다”며 “거액의 돈이 도는 시장이다 보니 항상 사기꾼이 들끓는다”고 말했다.

 이맘때만 되면 “형님, 추석이 다가오는데 뭐 없습니까”라며 상품권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 관행도 남아 있다. 지난 7월 강원도 화천군청 공무원들이 추석 명절을 앞두고 건설업자로부터 상품권을 요구한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상품권 업계 관계자는 “5만원권이 나오면서 뇌물용 상품권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현금을 주고받는 게 아직은 껄끄러워선지 상품권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스마트폰으로 거래되는 모바일 상품권을 돌파구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매장에서 스마트폰 화면만 보여주면 바로 구매가 가능한 모바일 상품권이 종이 상품권을 대체하고 있다. 보안 문제만 해결된다면 상품권을 서랍 속에 넣고 잊어버리거나 길바닥에 분실하는 일은 사라질 수 있다. 정훈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모바일 상품권 판매액이 지난해 1400억원에서 올해 세 배 이상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유통업체도 모바일 상품권 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 강남역 인근 건물에 모인 업체처럼 대량으로 모바일 상품권을 구매해 소폭 할인해 파는 온라인 시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정혁 티켓나라 대표는 “중국인들을 끌어들여 인천공항에서부터 모바일 상품권을 구매하도록 해 직접 상품권 매장에 오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모바일 상품권 시장이 활성화되면 인터넷 금융 거래 절차도 단순화되기 때문에 해외 한류 팬의 국내 아이돌 관련 물품 구입을 막는 공인인증서와 같은 걸림돌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민상 기자


☞ 백화점 10만원권 9만6000원, 구두는 할인율 20% 넘어

시중에 유통되는 상품권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 상품권 판매업체들은 “기업이 1억원을 주면 백화점에서 1억500만원어치 상품권을 주는 게 관행”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10만원짜리 상품권 한 장당 9만5238원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업체들은 기업이 대량으로 백화점에서 사는 상품권 중 일부를 유통시키거나 전문 중간유통업체로부터 사들인다. 여기에 몇백원가량을 더 붙여 거래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더욱 할인된 가격에 상품권을 살 수도 있다. 한 통신사는 2009년부터 요금제를 많이 사용하는 고객을 상대로 백화점 상품권을 10% 할인하는 행사를 벌여 왔다. 한도는 연간 100만원. 유통업체보다 할인율이 커 고가의 핸드백을 사려는 여성들이 대거 몰렸다. 이 통신사는 2013년부터는 전 고객을 대상으로 5% 할인해 주는 등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소셜커머스나 온라인쇼핑몰에서 상품권 10만원짜리를 9만4000원으로 할인해 주기도 한다. 한 온라인쇼핑몰 업체에서는 추석에만 10만원 상품권을 2만8000여 장 팔았다. 30억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다만 소규모 소셜커머스 업체는 돈만 받고 잠적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해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소비자원 이신애 조정관은 “상품권과 관련해 연간 2200건 가까운 상담사례가 접수되고 있다”며 “소셜커머스를 통해 돈을 지급했다가 상품권을 받지 못한 사례가 가장 많다”고 말했다.

 구두 상품권은 할인율이 20%를 넘어 여전히 추석 선물로 인기다. 하지만 최근 시장에 나오는 상품권이 많지 않아 구입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다. 한 제화업계 관계자는 “지난 설에 26%에 달했던 상품권 할인율을 이번 추석에는 20%까지 잡아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백화점이나 구두 상품권에서 벗어나 다른 품목으로 눈을 돌리면 의외로 쏠쏠한 혜택을 볼 수도 있다. 상품권 매장에 들르면 영화와 외식, 여행 상품권도 구할 수 있다. 영화 상품권은 1만원 상당을 8500원에, 피자는 5만원 상당을 4만2500원에 판매해 20% 가까운 할인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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